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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가루 May 19. 2022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해설

들어가면서

  저는 이 책을 총 세 번 읽었습니다. 스물두 살 때 한번, 작년 가을에 한번,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만, 이 책 역시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여기에 그 세 가지의 감상을 모두 적으려고 합니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후 인터뷰에서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와 재미, 그리고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특히 해변의 카프카는 여러 번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그의 바람을 꽤나 충실히 수행한 독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감상과 해석은 저에게만 옳습니다. 당신에게는 틀립니다. 이것을 읽는다면 부디 본인의 감상에 영향을 받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자기만의 감상을 오롯이 지키길 바랍니다.


이야기와 해변의 카프카

  스물두 살, 그때 저는 굉장히 고립되어 있고 고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너무 할 것이 없어서 책이라도 읽자 싶어 도서관에 갔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어로 된 책은 해변의 카프카와 식객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이 책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감상을 요약하자면, "재밌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은 본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책은 어떤 의미에서든 읽는 사람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책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줄거리만 보자면 해변의 카프카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자극적으로 양념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존속살해, 근친상간 등의 소재를 빌려왔고, 거기에 누나를 강간한다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작가는 관련된 장면을 묘사할 때 직접적인 단어 선택을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이토록 매운데 재미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마술적인 이야기들까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사랑했던 연인이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은 뒤, 사에키씨는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을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녀는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고, 주인공인 다무라 카프카를 낳습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죽어버린,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옛 애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국 사에키씨는 집을 나가게 되고 카프카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채로 자라나게 됩니다.


  여기서 더 재밌는 점은 카프카 소년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에키씨의 옛 남자친구의 환생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 누나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예언이 저주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출한 뒤 발 닿는 대로 갔을 뿐인데 어머니인 사에키씨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카프카 소년 혼자가 아닙니다. 홀수, 짝수 장을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나카타 노인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고양이와 이야기하거나,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순박한 나카타 노인과 그와 함께 있는 호시노 청년의 여정은 그야말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재밌는 것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책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음악이 들려옵니다. 작가가 여기저기에 팝송, 클래식 등 음악을 버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클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스물두 살 때 이 책을 처음 읽으며 책에 나오는 팝송을 찾아봤고 그 결과 지금의 음악에 대한 입맛이 만들어졌습니다. 사에키 씨가 노래하는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리며, 당시에 저는 기타로 작곡하며 사에키씨처럼 이상한 코드를 넣고 주변에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운동을 하며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스물두 살"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고독감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모로 그때의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입니다.


운명과 해변의 카프카

  저는 원래 TED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해변의 카프카를 소개하는 TED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 영상을 본 후 스물두 살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가을에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두 번째 감상은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 책은 모래 폭풍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중 일부를 적어 두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정리해 보면 우리는 살면서 모래 폭풍에 비유되는 운명을 맞닥뜨리게 되고, 운명은 마치 면도날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줄 것이며, 운명을 겪고 난 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통과제의로서 운명이 기능하고 있습니다. 즉, 이 소설은 가출을 한 소년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간 후 그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카프카 소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일이 진행되어 버리는 운명 그 자체, 운명의 메타포입니다. 그래서 하루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며 독자 여러분이기도 합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운명의 속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작중 인물들은 운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방식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운명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모래 폭풍, 면도날 등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다루는 운명은 잔인하며 슬픔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저주를 받은 카프카 소년, 사고로 죽은 옛 남자친구를 둔 사에키씨, 기억을 잃어버린 나카타 노인 등 운명으로 인해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잔인할 뿐 아니라 운명은 필연적입니다. 도망치는 방향을 바꿔도 모래 폭풍은 우리를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면, 발생하기 전에 걱정하고 피하려 한다든가, 발생하고 나서는 슬픔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꽤나 초연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작품 전체적으로 꾸준히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된다"입니다. 가출을 준비하는 카프카 소년은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마음의 목소리인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과 이야기합니다. 호시노 청년과 나카타 노인의 여정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대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운명에 상당히 순응적이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에키 씨 역시 자신의 아들인 카프카 소년과 성관계를 한 후, "하지만 그때 나는 이제 억지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만두자고 결심했어.  만일 거기에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이 이끄는 대로 계속 떠내려가자고 생각했지."라고 말합니다. 돌과 이야기하는 (독백이겠으나) 호시노 군의 대사 역시 운명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나도 사실은 꽤 못된 짓을 하면서 살아왔다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찌어찌하다 그렇게 된 거니까. 지금부터 다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인물들의 행동과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책은 운명과 과거의 잘못 사이에서 후회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며 그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는 모든 유기물이 시작된 태초의 장소이자, 무의식의 영역입니다. 해변의 카프카란, 모든 물질의 시작부터 필연적으로 그것의 안에 존재했던 운명과 그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이런 가여운 인간에게 작가는 "운명은 원래 잔인한 것이고, 따라서 잘못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운명에 몸을 싣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15세 소년이고, 이 책은 그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필연적 비극인 운명 덕에 인간은 성장하게 됩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특히 인물들의 대처 방식이 그렇습니다. 운명이 잔인한 것은 동의하겠으나, 정말로 과거의 잘못이 "어쩔 수 없는"일이었을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운명에 몸을 맡겨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 전쟁 중에 기억을 잃고 문맹이 된 것으로 나카타 노인은 설정되어 있을까요?


역사와 해변의 카프카

  두 번째 읽고 난 후, 어딘가 좀 의아한 부분을 해결하고 싶어서 고모리 요이치의 「해변의 카프카」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5가지 이유를 들며 「해변의 카프카」를 비판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여기서 역사의식과 책임 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무라카미 하루키론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나서 그 내용과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만, 그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채 세 번째로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오시노 씨의 산장에 간 카프카 소년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꿈과 현실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이 책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카프카 소년은 자신의 누나라고 상정한 사쿠라의 나체를 상상하는 것에도 허락을 맡을 정도였으니까요. "너는 상상력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꿈을 두려워한다. 꿈속에서 짊어지기 시작할 책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고, 잠을 자면 꿈이 찾아온다. 깨어 있을 때의 상상력은 어떻게든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을 막을 수는 없다.". 꿈속에서 잘못을 저질러도 진짜 잘못이고 책임이 발생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꿈을 우리는 막을 수 없어 보입니다.


  기시감이 듭니다. 앞에서 막을 수 없는 것을 이야기했었습니다. 바로 운명입니다. 그런데 꿈 역시 운명과 같은 궤도에 있습니다. 근친상간의 밤, 사에키 씨는 자신의 아들인 카프카 소년과 성교를 하지만, 이 도덕적 타락은 "어쩔 수 없어"라는 한 마디로 정리됩니다. 물론 그녀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섹스 후 죄책감에 울어버리고, 그녀의 폭스바겐 자동차 안에서도 시동을 켰다 껐다 합니다. 어느 순간 이 책에서 잘못은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운명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책에서 가장 역겨운 부분을 말하라 한다면 저는 39장 "근친들을 향한 성적 망상의 밤"을 뽑겠습니다. 어서 빼라고 이야기하는 자신의 누나에게 카프카는 자신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이미 늦었다고 대답합니다. 이어서 주어지는 텍스트를 조금 옮겨 놓겠습니다. "너는 이제 여러 가지 것에 멋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다. 혼란스러워지고 싶지도 않다. .... 그것이 어떤 저주라면, 그것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 꿈에서 책임이 발생하지만, 어쩌면 그는 잘못이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원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저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것뿐이거든요.


  카프카의 또 다른 누나로 설정된 오시마 씨는 방황하는 그에게 이런 조언이자 위로를 해줍니다.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예언 탓도 아니고, 저주 탓도 아니지. ....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시인 대사, 죄송합니다, 제 안에 악마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기시감이 드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비현실적인 일은 운명처럼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인 것은 맞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도대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조니워커는 카프카 소년의 아버지로 설정되어 있고, 나카타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합니다. 나카타 노인은 살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인을 강요받았습니다, 조니워커에게요. 조니워커는 폭력을 강요하는 존재,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는 국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살인을 했다고 자수하는 나카타 노인의 말을 젊은 경찰관이 믿지도 않고 웃어넘긴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시노 청년 역시 나카타 노인이 말해주는 전쟁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나카타 노인은 전쟁 중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고 문맹이 됐습니다 (저 사고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론에 흥미로운 해석이 있으니 보면 좋을 듯합니다). 그는 전쟁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젊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기억을 잃었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며, 그는 잃을 줄도 쓸 줄도 모릅니다. 소설 내내 그는 어느 평등한 농장의 말처럼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할 뿐입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사에키씨는 자신의 과거 기록을 나카타 노인에게 태워서 없애달라고 부탁합니다. 전쟁을 경험한 노인이 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과거를 태워버린다는 것이 적이 상징적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에키씨의 기록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둘은 이제 그들이 떠나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과거는 과거대로 두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아무리 노력해도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심지어 소설의 마지막에서 카프카 소년은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일을 하긴 했지만, 자신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고민이 될 때면 "바람의 소리를 들으면 된다"라고 합니다. 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노래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한창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던 시절 우연히 한 일본 분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유튜브 영상을 저에게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영상은 한국 청소년들에게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스시, 애니메이션 등을 이야기했고, 일제 강점기, 위안부 등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생도 다수였습니다. 그녀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며 이렇게 일본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아 슬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교과서에는 한국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제게 해주었습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저에게 그녀는 한 가지 더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역시 아무래도 한국 교과서에서도 일본 이야기를 다 빼는 편이 좋겠네요.".


  20세기에 인류는 그토록 믿어왔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광기의 사건을 겪었습니다. 작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비현실적인 사건, 즉 전쟁을 결부시켰습니다. 꿈에도 책임은 존재합니다만, 그 기록은 후세에 전해질 수 없습니다. 전해질 수 없도록 사건의 경험자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조니 워커는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이 땅에 남겨진 우리는 과거의 얼룩은 털고 다시 소년처럼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어쩌면 과거의 잘못이 정말로 나쁜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던 소년은 성장했으니까요.


  세 번 모두 감상이 겹치지 않고 게다가 다른 놀라운 책입니다. 내용 자체만 보면 재밌기 때문에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감상은 좀 역겹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 책을 세 번 읽었습니다. 세 번째는 아니 읽었어야 좋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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