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평생 교육원에서 웰다잉 수업을 듣고 있다. 직장에서 반강제적으로 들어야 된다 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신청했다. 이런 걸 왜 들어야 되나 툴툴거리면서도 직접 ‘죽음’에 대한 강의를 듣는 건 처음이라 평소 생각지도 못한 죽음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관할 지역의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며칠 전까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경로당에서 뵌 터라 그분의 사망 소식은 더 충격적으로 들렸다. 그 소식을 전해주는 어르신들은 어차피 연세가 90 넘어서 인생 살 만큼 살았다고, 병원에서 일주일 있다가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자식들 애먹이지 않고 잘 운명하셨다고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나도 웰다잉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면 그저 고인의 명복만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부고를 들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본인은 과연 자신이 잘 죽었다고 생각하실까? 사람들이 말하는 ‘잘 죽었다’는 기준은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지 정작 죽은 당사자의 입장은 아니지 않을까?
할머니는 이런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하지 못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당부의 말도 건네고 싶으셨을 테고, 남은 땅을 잘 정리하고 싶으셨을 테고,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지 준비하고 싶으셨을 테다. 나이 아흔에도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이 많으셨을 텐데 누가 함부로 살 만큼 사셨으니 이제 잘 돌아가세요라고 말할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면 부정 탄다고 손사래 치고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 들르거나 소금을 뿌린다. 장례식장이 집 앞에 들어선다 하면 혐오시설이라고 결사반대를 외치고 죽은 사람의 물건은 추억하지 못한 채 불에 태워 없애버린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있고 죽음의 순간은 반드시 직면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무조건 회피하기보다는 한 번쯤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교육 때 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이 왜 있는지 아세요? 바로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만약 불멸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린 인생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족을 소중하게 대하고 시간을 아껴가며 성실히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을까? 영원한 삶은 오히려 지루하거나 삶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가치와 의미가 선명해질 수 있는 것이다.(「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 셀리 케이건)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빛이 나는 것 같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밀도 있는 하루,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다면 잘 살았다고 웃으며 눈을 감지 않을까. 내 좌우명이 ‘후회 없이 죽자’인데 과연 내가 후회 없이 죽으려면 뭘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인생에 소설은 남기고 싶다. 남이 읽든 말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없다. 글을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내가 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바보 같은 후회를 하며 숨을 거둘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조금씩 소설도 쓰고 브런치스토리도 (열심히) 발행하려고 노력한다.
죽음은 예고 없이,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여주인공이 선고받은 날에 죽지 않고 결국 다르게 죽지 않은가.(어떻게 죽는지는 스포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 내 남은 것은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정도는 나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그러려면 사전 연명 신청서를 작성해 놓고 유언장이나 편지를 써두고 소홀했던 주변사람들을 잘 챙겨서 나도 후회 없이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이별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교황이 서거하며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본 적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영원.”이란 글을 남기셨다. 퇴근길, 할머니의 산소를 바라보며 할머니도 이생을 잘 사셨으니 새로운 영원의 삶도 잘 사시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