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디톡스 실험

by 류연X

필자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2011년만 해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친구들은 아직 많지 않았다.

단체 공지사항 같은 것들은 2G 폰을 가진 친구들을 배려해 문자로도 함께 보내던 시절이었다.


어느새 지금은 스마트폰 없이 산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같은 SNS는 사람들의 여가 시간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고,

한때는 SNS에 중독된 사람들이 일부러 스마트폰을 작은 ‘감옥’에 넣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2022년 11월, OpenAI가 ChatGPT라는 LLM 기반 챗봇을 출시한 이후,

Google Gemini, 중국의 DeepSeek를 비롯해 Perplexity, Claude 등 각기 다른 전문성을 지닌 수많은 버티컬 AI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제는 잠든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스마트폰과 함께 보내듯,

AI 역시 어느덧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첫 대화 상대는 아내도, 아이도, 부모님도 아닌 AI다.


출근길 약 20~30분 정도 운전하는 동안 그날의 일정과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ChatGPT 앱의 마이크를 켜고 캘린더와 메모장을 보며 생각나는 대로 말을 쏟아낸다.


“오늘 할 일이 좀 많은데,

9시에 주간 회의 있고, 3시까지 XX 보고 자료 보내야 하고, 5시에 이사회가 있고...

영업팀에 자동화 모델 도입하는 것 관련해서 영업팀장이랑 프로토콜 논의해야 하고,

YY 업무 가이드는 팀원 A에게 줘야 하고, 어제 ZZ 회사 사업성 검토한 내용도 본부장님께 메일 드려야 하고...

아, 지난주 답사 다녀온 보고서 양식도 팀원 B에게 가이드를 줘야겠네.

우선 회의 시간 동안 팀원 A가 자율주행할 수 있도록 회의 들어가기 전에 팀원 A부터 우선 챙겨야겠다.

아참 근데 영업팀장님은 외근이 많아서 오늘 외근 일정 체크부터 해야겠어.

답사 보고서는 급할 거 없으니까 점심 시간에 하자”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7~8개의 할 일을 이렇게 쏟아내면,

GPT는 그날의 스케줄을 고려해 우선순위, 병목 구간, 협의 대상까지 정리된 일정표로 만들어준다.

이제 나는 출근해서 그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기만 하면 된다.


오전 주간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A은행에서 대출 관련 질의서가 도착해 있었다.

기존 일정을 미루고라도 빨리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GPT를 켜고 설명을 시작한다.


“대주단 질의서가 왔는데, 새로운 자료 준비는 필요 없고 답변만 잘 쓰면 될 것 같아.

네가 은행 심사역이라고 생각하고, 내 답변이 적절한지, 질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내 답변에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진 않은지 검토해줘.”


평소였다면 최소 반나절은 걸렸을 작업이었다.

하지만 GPT는 내가 두서없이 내뱉은 설명을 정제해 주었고,

답변 초안에 대한 금융기관 관점에서의 리스크와 보완 방안까지 함께 고민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약 한 시간 만에 답변을 마무리해, 점심 전에 회신을 보낼 수 있었다.


일과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던 메일 작성마저 바뀌었다.


전 직장에서는 바쁘신 상무님들의 메일 초안을 대신 작성해 드리는 것도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고객사에 보내야 하니까, '적절하게' 써줘”라는 요청을 받으면,

이른바 ‘알잘딱깔센’하게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짧게는 수십 분, 길게는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내가 메일을 직접 보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이전의 내 역할을 해준 팀원 대신,

GPT에게 마이크를 통해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내용을 보내려는지 말한다.


그러면 GPT는 내가 한 시간 이상을 고민해서 썼을 문장보다 더 고급스러운 어휘와 정제된 문장으로 작성된 메일 초안을 수십 초 만에 '알잘딱깔센'하게 작성해 준다.

혹시 내가 보고 수정 요청을 해도 다시 수십 초. 검토부터 발송까지 평균 15분 정도 걸리는 듯하다.


이렇게 하루를 AI와 함께 보내다 보면, 매번 강한 성취감이 따라왔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치 내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느낌이었고, 생산성의 정점에 서있는 듯 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이 자기 효능감은 바이브 코딩을 통해 업무 자동화 툴을 만들면서 정점에 달했다.


개발자도 아니며, 코딩 언어조차 제대로 몰랐던 내가,

Claude와 밤새 수십 번 대화를 주고받으며 간단한 업무 자동화 모델을 완성했다.


이전에는 팀원이 하루종일 시간을 쏟아야 했던 작업이, 이제는 클릭 한 번으로 10초 만에 산출물이 출력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처음 받은 원시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감동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LLM을 많이 쓸수록, 아이디어는 풍부해지고, 문장은 수려해지고, 생산성은 눈에 띄게 올라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중에 '진짜 내 것'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온라인 환경에서 AI를 거쳐 나온 나의 결과물은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AI가 꺼진 순간의 나는 어땠을까.


오프라인에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 아무 도움 없이 글을 써야 할 때,

나의 어휘력과 사고력, 전달력은 과연 성장했을까.


바바라 민토의 『논리의 기술』을 읽으며 문장 구조 하나하나를 고민하며 글을 작성하던 그때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정말 더 나아진 걸까.


AI는 분명 사고를 확장해 주고, 암묵지를 문장으로 바꿔주며, 내적 사고의 정밀도를 높여준다.


AI는 여전히 나의 훌륭한 파트너이지만,

내 생각의 주인은 언제나 나라는 점을 다시 한번 다잡고,


오프라인에서도 성장한 내가 되기 위해,

나의 생각하는 근육을 다시 단련하기 위한 'AI 디톡스'를 시작하고자 한다.


앞으로 매주 2시간.

그 시간만큼은 AI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책과 뉴스, 또는 일상에서 얻은 생각들을 오롯이 나만의 문장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답은 느려져도 괜찮지만, 대신 오래가는 생각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