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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Oct 22.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9>

3장. 영혼의 자립을 위한 교양

(2) 권력은 내가 아니다


   권력이라는 구체적인 대상 개념은 이념이라고 하는 마음의 초월적 지향성과 엄밀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철학자 칸트에게는 이 구분이 지성(Verstand)과 이성(Vernunft) 이념의 구분으로 나타난다]. 우리 안에서 내사되고 또 관리되는 어떤 권력이 마음의 안팎에서 갖는 투명성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힘을 발휘한다. 하나는 그저 ‘바깥(절대적인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자체(상대적인 시간)의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초월 요구를 완수하거나 충족하는데 쓰이는 차원이다. 예를 들어 초록빛이 감도는 어떤 물병은 절대적인 현실 차원에서 마실 물을 담기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오브제가 된다. 더 알기 쉬운 예로 돈이라는 권력으로 예시를 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돈을 단순히 먹고 살 음식과 집의 현실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눈금 단위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부자’라는 이념적 우월성을 지탱하는 상징으로 또는 ‘가치 있는 곳’에서 상대적인 만족감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권력은 마음 그 자체는 아니면서 마음이 내면화해 사용하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현실을 위한 사용 차원은 당연히 후자인 삶의 차원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다. 가령 ‘무거운’ 상상적 운명을 가진 마음은 고즈넉한 장소적 중량감을 가진 ‘실체적인 집’을 유지마련하기 위해 충분한 돈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반면 ‘가벼운’ 상상력을 가진 마음은 저 ‘바깥’의 무거운 경계와 책임을 언제든 벗어버리고 가벼워질 수 있는 해결 조건을 상시 보유하기 위해 돈을 벌고 싶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권력이 가진 안팎의 투명성을 불투명한(사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과정이 늘 우리 영혼의 숨은 상대성에서부터 조심스럽게 기획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가 외부의 타인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혹은 얼굴과 신체를 관리하는 취향에도 영향을 준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영화라는 기술 프레임을 통한 지각이 인간 신체를 통한 지각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내사된 권력이, 가벼운 상상력의 운명을 가진 마음의 유목적인 시간과 상승적 운동을 시각화하는 예술 표현에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 장면들의 기계적인 연계 운동은 참여자가 삶의 여러 비자발적인(절대적인) 느낌들로부터 충분한 '탈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 들뢰즈는 물리적 현실을 상상력과 혼합한 개념으로 ‘기체적 지각’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술적인 승화보다는 주로 이념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숙명적 차원에서 권력을 내면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에 걸맞는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자나 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을 때, 많은 돈이라는 권력을 순수하게 마음 안팎의 투명한 교환 수단으로서만 파악하는 사람은 소수에 그친다. 즉, 그때 ‘부자’의 이념을 욕망하는 사람은 많은 돈 또는 돈 버는 방법이라는 내사된 권력을 이념적인 권력으로 의미화한다. 그리고 이는 곧 소유된 권력 그리고 그것이 이념적으로 구성하는 세계가 삶의 의미의 ‘추월차선’, ‘치트키’ 같은 것이 되어 당사자의 마음과 자기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마음은 세상이라는 ‘바깥’을 끌어당기는 특정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동화(同化)시키는 그런 외부 배타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는 마치 ‘명문대학’이라는 소속적 상징을 순수하게 학업을 보조하기만 하는 권력으로 여기는 사람, 또는 어떤 학술 공동체와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수행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기여나 사적인 삶의 철저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선을 긋는 사람이 소수인 것과 같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마음의 숙명이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세계-내-존재라고 불렀다. 그때 여러 마음들의 공(公)과 사(私)는 어떤 이념화된 권력장 내부의 소통법을 상호 각인하는 폭력에 기초해 ‘형제-자매애’의 관계망으로 얽힌다. 즉 우리 삶의 운동은 곧 이념적인 배타성과 결합하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념적 권력이 발생하는 중심을 향해있는 가운데 서로를 안팎으로 검열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이 그 내부에 속한다는 것을 자기가 내사한 권력적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정치적인 성향이 짙은 커뮤니티 안에서 사용자가 보이는 말투나 메시지, 혹은 교회에서 신도의 간증이나 방언 내용이 흡사 경쟁적인 과시와 자기비판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은 이런 현상 때문이다. 그 같은 자기 검열의 핵심 동기는 바로 타인을 상시 검열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쥐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쓰이는 권력은 노골적으로 편집적인 방식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특히 이 점 때문에 이념적인 권력에 강하게 집착한다. 만약 어떤 알 수 없는 타인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이념적 권력을 통해 균질화되지 않는다면, 즉 사람들이 권력을 단지 투명한 수단으로만 사용한다면 영혼은 기본적으로 서로 자립적인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큰 돈을 벌기 위한 재테크 방법을 함께 공유하는 어떤 모임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꺼낸다. “사실, 돈이 많다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때 돈을 철저히 현실적인 권력으로만 파악하는 부자는 다음처럼 대답할 가능성이 높다. “맞아요. 저도 요즘엔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고 또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고민 중이에요.” 반면 이념적인 부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꼭 돈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죠.” 이때 그는 타인 혹은 세상이 이념적인 권력장과 무관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권력을 통해 ‘바깥’의 타인 혹은 의미를 환원적으로 제어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끼면서 그것을 투사적인 적개심과 경계심으로 표출한다.

   텅 빈 마음은 어째서 그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는 불안하고 외로운 상태에 있는 마음이 밤의 시간을 통제 및 유예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바깥’과의 충족적인 관계 궤도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념적으로 추구된 권력 그리고 불안을 통제하는 반사적인 몸짓을 동시에 사용한다. 이념적인 삶은 자신만의 마음의 곳간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는데, 왜냐하면 절대적인 시간과의 불화(不和)와 채워지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마음의 경직성이 아직 충분히 이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독자적인 삶의 의미가 완수되지 않음을 느낀 사람들은 재테크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자기효능감으로 의미를 연명해나가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이 같은 경험들을 일상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어떤 직장 상사들은 조직 구성원들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 짓는 데서 큰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맡은 일을 마치고 각자 사적인 삶의 영역으로 돌아서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그 같은 태도를 비교적 세련되지 못한 ‘꼰대 마인드’로 견제하는 경향이 커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직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인 한,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한 ‘투명 사회’ 속에서 외로움을 앓는 사람들은 여러 사교 모임과 자신에게 맞는 부족적인 이념 관계를 찾아 배회하게 될 것이다. 한편 개개인의 경계와 책임 소재에 대한 현대사회의 투명한 존중과 거기서 드러나는 외로움, 혹은 여러 심리적 결여 증상들을 ‘개인주의’, ‘통제 사회’, ‘공동체의 해산’, ‘인류의 자기소외’ 등으로 적대 규정하면서 이념적인 권력장의 불투명함을 은밀히 부추기려는 시도들도 있다. 가령 철학자 한병철의 『투명사회』 등 저작들은 바로 그 같은 사례에 해당한다.

   권력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이 바라는 무엇인가를 실제로 현실화하기 위해 중요해질 수 있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과 단지 쾌적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권력을, 자신의 가치를 지탱해주는 목숨줄과 동일시하면서 살아간다. 만약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 권력을 제거한다면 그는 즉시 ‘추락'할 것이다. 취약한 마음은 이념적인 자아상에 부합하는 권력을 조달할 수 없을 땐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느낀다. 예컨대 미래에 충분한 돈이나 명예를 축적할 수 없다면, 자기가 속한 정치공동체의 이념적 앎이 산산이 해체되고 무력화된다면, 혹은 아름다운 얼굴에 화상을 입거나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그때 마음의 이념에 봉사하던 권력은 세상과의 관계 문제를 자기 쪽으로 ‘감아주는’ 방법이었고, 여전히 마음은 밤의 시간으로 하강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이제 ‘쓸모가 없게 된’ 마음은 박탈감과 더불어 삶을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그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건강은 이미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두 명의 부자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진보적인 정치 이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가령 “그 운동은 내 영혼의 자립이나 복잡한 현실을 지탱하는 문제와 별개의 것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 꼭 필요한 순기능을 하고 있어.”라고 지지를 표하는 사람과, 그 운동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유토피아적 의미점으로 지향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의 능력을 기르거나 혹은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유와 통찰력을 기를 수 있다. 팽팽하게 이념화된 마음이 이완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권력과 구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권력을 공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현실적 활동 역량은 똑같이 유지되며, 오히려 과도한 경직성이 이완됨으로써 많은 측면에서 그 역량이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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