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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Oct 20.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8>

3장. 영혼의 자립을 위한 교양

(1) 현실은 내가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메타적인 사고의 유희를 즐기는 독자들을 위해, 1부에서부터 다루었던 마음과 권력의 관계를 최종 결산하는 목표에 집중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얻어질 이해는 우리가 그간 지나왔던 마음에 관한 다면적인 탐사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치하고 또 합류한다. 사실 심리학이나 철학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내재적 동기는 우리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숨이 트일 것 같다고 느끼는 데 있는 듯하다. 철학책과 직접 맞닥뜨린 독자들은 바로 그 같은 마음의 동기를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철학이 난해한 것은 일반적으로 철학자의 문제이지 독자의 문제는 아니다. 대개 철학자들의 상상력은 ‘현실은 우리 자신과는 구분된다’라는 문장에 함축된 촘촘한 현상 분석의 책무를 잘 감당해내지 못한다. 철학책은 바로 이 논점의 투명성을 회피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어려워지고 현학적으로 추상화되는 면이 있지만, 일단 저자의 일관된 이념적 의도 전체를 관통하고 나면 설명 상의 모든 허술한 이음매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의 순수한 내재적 동기가 소박한 이념적 합의에 멈춰서지 않도록 최대한 간편한 설명틀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미 필자는 권력과 이념이라는 단어들을 이 책의 종합적인 관점에 입각해 조작적으로 재정의해 사용해왔다. 이제 우리의 여정을 통해 포개어지면서 서서히 두터워진 그 진의(眞意)를 일목요연하게 집약해보도록 하자. 상대적인 시간으로 펼쳐지는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저 ‘바깥’의 절대적인 시간에 던져졌다. 그래서 마음은 저 냉엄한 바깥의 시간을 늘 현실적으로 염려하면서 살아간다. 만약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외부적 현실에 대해 마음이 지속적인 통제감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즉 마음의 내부적인 예상이나 기대치를 ‘바깥’의 상황과 연결해주고 또 해결해줄 어떤 것을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가 수용하는 ‘어떤 것’이란 손이나 발처럼 분명한 구체성을 갖는 것으로서, 그 최초의 강력한 형태는 부모의 존재 자체 그리고 부모가 가진 언행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이 어떤 대상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현상을 ‘내면화한다’ 또는 ‘내사한다(introject)’고 정의한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우리는 ‘바깥’의 사태에 보다 잘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내사하기 시작한다. 가령 젓가락 같은 도구의 사용법,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신체를 관리하는 방법, 언어적 상징이나 시계를 읽는 방법, 도덕적 금기와 교통법규, 또래가 쓰는 유행어, 받은 용돈이나 PC를 사용하는 방법,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기술 등이 그것이다. 사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처럼 내사된 것들을 ‘도구적 존재자’, 혹은 ‘손안의 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정의가 이 책의 시야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자는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 나는 마음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내사된 대상들, 그러나 우선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대상 형식을 ‘권력’이라고 정의한다. 재정의된 권력의 중요한 특징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그런 구체성이다. 그래서 마치 형태가 분명한 장난감 블록처럼, 권력은 외부 사태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조립 및 환원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곧 권력이 우리가 바깥 세상과 시도하는 의사소통의 안전한 채널이 되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일을 함으로써 돈이라는 권력을 받고, 또 어딘가에 돈을 내면 그에 부합하는 식사나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다. 만약 시계 권력을 내사한 경우라면 지금 친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30분 뒤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해커나 수학자들은 특수한 언어 권력을 내사함으로써 그가 속한 국적이 어떠하든 국제적인 협업이 가능하다. 한편 군인들은 규칙적인 일과와 제식 훈련을 반복적으로 내면화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을 균질화한다. 또한 사람들은 두 개인 사이의 복잡미묘한 분쟁을 사법적 권력을 통해 조정하거나 결정지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사례에서 권력이 갖는 어떤 공(公)적인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통해서 마음 안팎의 커뮤니케이션이 마치 그물망처럼, 일반화된 약속에 따라 서로 교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적 교환이 사람들 사이에서 투명하게 지켜져야만 비로소 저 ‘바깥’의 시간은 모두에게 통제 가능한 익숙한 현실이 될 수 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근로 계약서에 명시된 돈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화가 날 것이다. 반면 지갑이나 휴대폰을 깜빡 두고 나왔을 때 우리는 현 사태를 친구들에게 밥을 사줄 능력이 결여된 상황으로 파악한다. 한편, 만약 나에게 오전 7시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후 5시라는 의미로 쓰인다면 약속을 잡기가 곤란해질 것이다.

   지금껏 이야기한 맥락에서 권력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마음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은 곧 책임 소재가 명확한 방식으로 외부 세상을 예측하거나 검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일정한 억압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우리가 공권력이라는 투명한 약속(억압)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밤늦게 길거리에 돌아다니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안전함을 희생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의 핵심이 역전된다. 즉 우리에게 있어 권력이라는 발명품은 투명한 공적 방식뿐만 아니라 불투명한 사(私)적 방식으로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마음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의 작용은 애초에 사적인 사용 방식이 일차적이고 공적인 활용은 파생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타인이 우리에게 잘못을 했을 때 법적 투명성을 부르짖다가도, 자신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때 권력은 더 이상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바깥’에 대한 우리 내면의 욕망을 위해 쓰이는 불투명한 도구이자 가면이 된다.

   여기서도 가볍게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의 촬영된 얼굴은 주민등록상 그 어디서든 동일 인물임을 투명하게 식별하기 위해 공공기관, 은행, 각종 지원서, 시험장 등에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사적으로 자유롭게 가꾸고 ‘사용’한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겁을 주거나, 타인을 웃기거나, 타인을 매혹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때 우리가 내사한 우리의 얼굴 표정 및 꾸밈새가 어떤 의도로 ‘바깥’에 자기를 내비치고 있는지를 타인들이 경험적으로 추정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당사자의 내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움직이고 있는 그 권력(얼굴)의 의미를 타인이 투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요컨대 그때 권력의 표현과 움직임은 당사자의 사적인 마음의 역사, 두려움, 그리고 편향적인 욕망이나 가치관 따위를 고유한 방식으로 함축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라고 일컫는 빅브라더의 얼굴은 바로, 스스로는 다른 권력 주체(이를테면 주권자)에 의해 투명하게 검열받지 않는 예외적 자리에 있으면서도 언제든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기를 꿈꾸는 그런 권력 주체의 얼굴을 가리킨다. 그 불투명한 얼굴의 주인은 일종의 신적인 원인,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가 된다. 그러나 그런 빅브라더의 원형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깥’에 대한 일방적인 권력 주도권을 욕망하는 모든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욕망을 외부의 다른 권력 주체에게 투사(projection)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권력의 불투명한 사용 사례 역시 무한히 늘어놓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볼펜과 문자언어라는 가치중립적 권력들을 가지고 서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필로 되어 있는 한 글씨체는 결국 우리 마음의 고유한 스타일을 반영하게 된다. 한편 숫자와 문자열이라는 가치 중립적 권력 역시 우리가 그것을 구글 계정의 패스워드로 선별 조합할 때 우리만의 불투명한 비밀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인형을, 농구공을, 게임 캐릭터를 각자의 추구대로 가지고 논다. 또 우리는 사적인 이득을 위해 공식 문서나 지폐를 위조하려고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들처럼 ‘투명한 법치국가’의 규정을 두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벌일 수도 있다. 미술작가들은 구체적 재료나 안감, 기술 매체를 변형시켜서 자신만의 예술작품을 만든다. 게다가 그것을 목격한 어떤 사람은 ‘예술가’라는 알쏭달쏭한 권력(단어)을 자기가 사적으로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스스로에게도 중복된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때 ‘예술가’라는 단어는 이미 이념적인 권력이다. 왜냐하면 그 해석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이야기로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적용 규정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무언가를 늘 앞지르면서 보편적인 확신부터 갖고 보는 이념의 숙명은 이미 마음이라는 상대적 시간의 운명적인 상상력에 귀속되어 있다. 예컨대 가벼움과 상승을 희망하는 마음의 필연성은 깊거나 무거운 어떤 예술성을 파괴하는 유희 속에서 그런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2부의 초입에서 필자가 “마음의 투사는 언제나 ‘어떤 것’의 내사보다 우월하다”고 미리 언급했던 내용을 떠올려보자. 현실적인 권력 사용의 이면을 말하는 우리의 논의 단계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가 직접 사용하거나 가지고 노는 모든 권력은 일단 우리 자신의 이념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념적이든 혹은 예술적이든, 우리의 상대적인 영혼은 그 자체로는 결단코 현실도 권력도 아니다. 가령 ‘이념적인 권력’은 적절한 말이지만 권력 자체를 이념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리의 투명한 사고방식을 마구 뒤섞는 착오의 늪에 빠져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바로 그러한 불투명성의 대표 주자이다. 그는 마음이 가져다 쓰는 권력의 불투명한 움직임을 ‘강도적 차이’라고 부르고, 그의 영화미학에서는 이것이 쁠랑(plan)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가 가진 투사적 상상력의 요점은 마음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선별한 저 권력의 형식들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절대성과 타인의 영혼이라는 상대성 모두를 기적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철학을 ‘개념의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차이(권력)는 그 자체로 마음의 이념과 같지 않으며, 마음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이념이 우월하게 먼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의 여정이 이야기했듯 이념적 욕망은 텅 빈 마음의 숙명적 한계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권력을 불투명한 일방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형태로 계속 동원하는(즉, 공적인 영역을 자꾸만 사적 이념으로 유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력을 공적으로 투명하게 교환해 사용하는 방식만 가지고서는 마음이 결코 저 ‘바깥’에 대한 염려나 욕망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들도 나를 모르는 듯하지만, 나 역시 타인들을 모른다!”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위축된 마음은 게임이 너무 투명하거나 공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엿보거나 마음대로 관여할 ‘비판적’ 자격을 갖더라도 자기 자신은 타의에 의해 통제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사람들의 상대적인 시간은 모든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유희가 있기를 희망하고, 삶과 죽음의 진실에 대해 충분히 틀어쥐기를 원하며, 충만한 힘과 권능 그리고 철옹성 같은 비밀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를 욕망한다. 그와 함께 취약한 마음은 자신의 혐오나 미움을 자극하는 '바깥'의 것 일체를 자신의 권력을 통해 통제하고 또 징벌하는 규정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한다. 어쨌든 이 같은 권력 적용의 예외적 위치와 초월적인 확신을 확보하자면 실정적인 권력이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검열시키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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