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무스 Oct 17.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7>

2장. 사랑에 관하여

(5) 내가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었음을


   우리집 고양이 네티는 내가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신 뒤 화장실에 갔다 나오면 항상 문 앞 발매트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상처가 있는 ‘회피형’ 고양이인 네티는 이렇게 되기까지도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지금도 사랑받을 사건을 정면으로 인식하고 다가온다기보다는, 아침에 욕실에서 소리가 날 때 내게 오면 ‘뭔가 좋은 경험이 생긴다’는 걸 알고 마치 학습된 버튼을 누르듯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문을 닫고 네티가 먼저 내게 헤드번팅을 하게끔 놓아둔다. 그리고 머리부터 살살 쓰다듬는다. 만약 실수로 내 손바닥이 시야를 가리면 불안해진 네티가 도망갈 수 있으므로 나는 조심한다. 네티는 딱딱한 바닥보다 푹신한 발매트에 발바닥이 닿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즉, 특정한 ‘윤리적 조건’ 위에서 편한 몸짓을 취할 때 애정을 더 잘 만끽하는 것이다. 곧이어 나는 완전히 바닥에 앉아서 네티를 품속에 안는다. 이때 눈을 마주쳐버리면 네티가 딴청을 피우듯 반사적으로 자리를 뜨기 때문에 뒤에서 안아줘야 한다. 나는 아침마다 이렇게 5분에서 10분, 다소 얼떨떨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편안해진 네티와 함께 있어 준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아이의 성향 자체가 변할 리는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민한 긴장과 강박적인 행동은 점차 안정될 수 있었다.

   대개 마음과 단단히 결합해 있는 ‘익숙한 불행’이란, 일종의 반사적인 몸짓으로 반복되는 삶의 양상 그 자체로서 항상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익숙하게 세팅된 현실 안에서 이따금 허락되는 덧없는 기쁨과 덧없는 달아남을 습관처럼 반복하는 일. 저마다의 삶의 방식에 체화된 그 어리석음은 바로 우리가 절대적인 시간과 관계를 맺고 또 그것을 소화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익숙한 활주로를 이탈하는 모험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끓어오름을, 손에 익은 방식으로 시도된 관계가 가져오는 익숙한 소진과 파국을 택한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마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자유분방한 성애조차도 변화에 관한 ‘개방성’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결핍을 자극하는 욕망 대상이 고무하는 긴장감이나 그로 인해 불안정하게 벌어진 마음의 ‘틈’을 서둘러 봉합하는 방법으로 자주 성애적 몸짓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한편 사회적 삶에서 마음의 불안은 탄력적인 분위기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뻣뻣한 엄숙주의, 혹은 반대로 진지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서 방방 뜨는 그런 방어적인 몸짓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서 ‘바깥’을 등진 삶 그리고 밤의 유희는 자연히 긴장을 이완해줄 안전한 공간들을 찾아 헤매게 된다.

   사실 외부에 대해 폐쇄적으로 공간화되는 몸짓은 비밀스런 사랑에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특히 자신에게 맞는 공간을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적절히 찾아내는 일은 일종의 축복이요, ‘바깥’의 시간에 정처없이 휩쓸리지 않기 위한 마음의 교양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흔히 ‘비판적’ 성향의 이론가들은 거주지, 낯선 여행지, 기획전시관, 온라인 커뮤니티, 대도시와 농촌의 상반된 공간성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이나 소설, 사진, 기록물과 영화 프레임이 간직한 공간적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종종 아름답고 고즈넉한 공간에 대한 감탄과 애정을 무심결에 표현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현실에 대한 염려에 잔뜩 짓눌려있던 영혼이 사실 넉넉한 곳간과 여백을 바라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그 무엇보다 최초의 공간이라 말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익숙한 자세를 취하고, 계속 말하거나 소리치고, 무엇인가 챙기거나 저지하고, 숨거나 웅크림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낸다. 어떤 부모들은 불안해하는 아이를 달랠 때 양팔을 포개어 ‘자기 공간’을 만들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수축된 양팔과 등뼈는 절대적인 시간에 맞서 우리의 상대적인 시간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궁륭인 셈이다. 한편 몸은 불안하고 경직된 낮의 의식이 밤의 시간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하강과 결합의 매개물로도 기능하는데, 거기서 촉각적인 감미로움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추락이자 이완이 된다. 아무리 아늑하게 정돈된 공간이라 해도 몸의 따뜻한 활력과 호의적인 품이 부재하는 공간은 결국 공허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과 타인의 품이라는 공간은 곧 보호받는 사랑의 시초이자 완성이 되는 것이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이 같은 공간적 ‘감싸임’, 또 그로 인해 완곡해진 밤의 시간에 대한 요구를 ‘요나 콤플렉스’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시간은 곧 부활의 희망을 위한 재생의 시간을 뜻한다.

   내가 우리집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삶의 반사적 몸짓 그리고 웅크림과 스킨십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절대적으로 채워지고 또 채워주는 사랑의 중요한 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열정적으로 혹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몸짓이나 고수된 생활 습관 속에는 반드시 밀폐된 채 감추어진 어떤 ‘익숙한 불행’이 들어있다. 그 몸짓은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되살려주고 또 일시적인 안정을 찾아주지만, 동시에 언제까지고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차단막이 되기도 다. 수십 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연구한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자신의 책 『몸은 기억한다』에서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상담했던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참전자 모임에서 군인들은 자기 동료의 팔다리가 나뒹굴던 잔혹한 광경에 대한 말이 나올 때 대단히 신나고 격정적인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즉 과거의 어떤 두려운 상황과의 관계맺음을 ‘윤리적인 방식’으로 재개하면서 갑자기 텅 빈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들은 실제로 특정 자극에 격하게 고무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의 감각이 굳고 경직되어 있는 까닭에, 그밖의 다른 일상이나 자신의 존재감을 둔감하고 희박한 것으로 경험한다고 한다. 이때 몸은 여전히 과거에 경험한 어떤 초긴장상태를 반사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모종의 침입 공포에 맞선 공격 준비일 수 있는데, 이따금 부모로부터 폭력이나 방임을 경험한 사람들도 이 같은 수축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사실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실제로는 누구든 ‘강렬한 바깥’에 노출된 삶을 지탱하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자신만의 반사적 몸짓들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다른 몇몇 예시들을 제시했었지만 가령 손톱을 물어뜯는 경우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위축되어 있는 경우, 견디기 어려울 때 타인이나 자신의 신체에 파괴적인 행동을 하거나, 성애적인 쾌감이나 타인을 매료시키는 자극 요소에 중독된 경우, 과장된 연극투나 공적인 말하기로 인한 수축 때문에 호흡이 짧아지는 경우, 결벽공포적인 수준으로 신체 및 실내 청결고수하는 경우, 음주 및 흡연으로 불안감이나 신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경우 등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몸짓이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걱정하고 살펴주어야 할 어떤 면면들이다. 그것은 무심결에 외부에 알려지는 간접적인 도움 요청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긍정적으로 삶을 지탱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서로를 보호하고 또 안정시키는 사랑에서 ‘표현된 스킨십’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스킨십은 우리의 반사적인 몸짓이 ‘바깥’에 대해 체화경계심을 넘어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에 놀라운 역할수행다. 비록 연인 사이에서 보다 깊고 내밀한 표현들이 오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스킨십은 성애가 갖는 환상적이고 탐닉적인 성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성애의 기쁨이 주는 관계적 충만감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개별 영혼의 입장에서는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스킨십이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애적인 욕망은 종종 우리 자신과 타인의 몸을 아주 형편없이 취급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려서 부모님이 자신의 배를 쓸어주거나 번쩍 들어 안아주던 기억, 누군가가 뭉친 어깨나 체증이 생긴 손바닥을 마사지해주던 기억, 혹은 가까운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거나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그런 격려의 기억이 자신에게 큰 위안으로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사실 약간 깐깐하게 말한다면 ‘그깟’ 작은 스킨십이 우리가 짊어진 삶과 현실의 무게를 해결해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그것은 우리의 소진된 마음을 일으킨다. 실제로 스킨십의 진정한 본질은 몸과 몸이 닿는 방식 자체가 아닌, 우리의 몸이 삶에서 겪는 수난에 세심하게 공감하는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따금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의 이마를 짚어주고, 집중하느라 차게 식은 타인의 손과 복부에 따뜻한 것을 내어주고, 조그맣게 물집이 난 상처에 약을 가져다주고, 휴식하는 사람 곁에서 너무 밝은 조명을 낮춰주고, 상대의 열린 가방이나 단추를 대신 잠가주고, 일교차를 잘 간과하는 사람에게 한 겹 외투나 머플러를 둘러주고, 긴장한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등 행동들이 죽어가는 마음을 회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타인의 몸은 반드시 엄격한 독립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의 몸은 절대로 그저 독립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어리석은 몸짓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남몰래 품고 어루만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에는 오줌을 잘 가리지 못하는 반려견 ‘카레닌’과 등장인물이 이별하는 순간을 표현한 대목이 나온다. 그 짤막한 부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카레닌은 오줌을 싸고 우리에게 왔다가 오줌을 싸고 우리로부터 가버렸군 하고 테레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개의 마지막 인사인 축축한 오줌을 그녀의 손에 느끼고 기뻐했다.”  같은 장면은 내가 그것을 글로 읽는 때마다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과 온기를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떠나가는 카레닌의 뒷모습은 바로 매일 밤잠을 청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결국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되찾기 위해 점점 더 세상으로 다가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한 모습으로 삶을 여행할 수는 없다. 아마도 사람이 무한히 찾아 헤매는 관계란 밝게 웃으며 나를 견디고, 나 대신 내 영혼의 슬픔을 짊어지고, 또 나의 말 없는 우산이자 지붕이 되는 그런 인연과 보내는 유한한 시간이리라. 실로 지나친 욕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그런 순간이 허락된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이라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전 26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