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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Oct 14.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6>

2장. 사랑에 관하여

(4) 사랑의 상대성 이론


   나는 독자들이 충만한 사랑에 대한 염원 속에는 타인의 현재를 우리의 이상향에 끼워 맞추려 할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주길 희망한다. 앞서 이야기한 사랑에 관한 진심은 자기 경계만을 지키는 진심이란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 즉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달라는 윤리적 요구는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고집과 수축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때 결국 사랑을 어긋나게 만든다는 계시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 같은 이상적인 함의는 자칫하면 당장 불행하거나 불완전한 실존적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일종의 타락한 그림자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는 필자가 말한 사랑의 충족 가능성이 오히려 플라톤이나 에리히 프롬의 고루한 사랑론보다도 더 불가능하게 보일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철학자들의 사랑은 언젠가 그 관계 이념을 저마다의 중심에 이식하고 또 내면화할 편리한 가능성이라도 암시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는 바깥에서 오는 사랑이란 결국 우연적인 인연에 너무도 의존한다는 것이고, 또 그러한 타이밍의 관점에서 볼 때는 우리 내면의 필연성이 소중한 우연에 대해 미리 준비되어 있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내면의 역사가 숙명에서 운명으로 이행해가는 것처럼, 어떤 누군가의 영혼을 채워주는 사랑을 위해서는 결국 좁다란 마음 안에 갇힌 우리의 사랑법 또한 성장해가야 한다.

   우리는 2부에서 ‘바깥’의 시간을 두려워하는 낮의 체제의 마음 매듭이 서서히 풀리는 가운데 밤의 시간이 엄습하는 양상을 조망해 보았다. 그것은 독거미 타란툴라와 같은 마음의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실체를 목격하는 모험이면서, 또 불행하고 결핍된 영혼이 짚는 ‘목발’과도 같은 이념적 욕망 또는 자아가 차츰 해체되어가는 여정이었다. 그 끝에서 우리는 예술의 상대적 운명이 깊은 심연(절대적인 시간)에 직접 속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불화를 사랑으로 해소함으로써 이념 너머의 영혼이 가진 숭고한 깊이를 되찾은 예술가로 반 고흐의 사례를 제시했다. 한편 3부에서는 이 같은 숙명적 몰락과 운명적인 전환을 보다 현실적으로 체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두 가지 측면이 조명되었다. 한 가지는 우리가 이념이라는 매듭 혹은 ‘목발’을 실질적으로 제거하려면 먼저 절대적인 시간과 화해하고 또 그것에 의해 충족되는 마음의 재활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미 마음을 잃은 시절부터 늘 무언가를 앞질러 가고 싶어했던 우리가 그 표현으로 이념적인 자아와 신체화된 충동을, 또는 보다 승화된 예술성을 얻었든지 간에, 그 상상된 희망(기획투사)의 실체란 적어도 바깥(절대적 시간)이 아닌 내부(상대적 시간)의 빛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희미한 빛의 필연성은 철학자 에밀 시오랑이 ‘나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빛’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운명적 지향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충만한 사랑을 향해 마음을 전환하는 과제와 관련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을 현실적으로 배려하기 위한 약간의 시야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 마음의 상대성에서 시작해보자.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이라는 책에서 다음처럼 상대적인 몸과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경험주의의 모든 명제들은 역전되어 나타난다. … 수동성은 수동성의 정립이 된다. 세계는 세계에 대한 사유의 상관항이 되고….” 이 문장은 약간 난해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 독자들은 이 책의 2부 1장에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자신의 고통받던 시기에 그린 《검은 회화(Las pinturas Negras)》의 사례를 소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화가는 신체와 정신이 느끼는 고통(수동적 경험)의 절대적 깊이를 늘 검은색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처럼 검은색이 더없이 진해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또한 밝은 색채를 좋아하는 명랑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때 퐁티가 말하는 수동성의 정립이란 곧 ‘우리 자신의 밝은 색채에 의해 더욱 검어진 바탕’ 정도를 의미한다(이 철학자가 실존주의적 환원론자라는 한계는 일단 제쳐두자).

   그렇다면 여기서 명랑함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마음의 상대적 층위란 대체 무엇일까? 3부 1장에서는 ‘무거운 상상력’을 상대적인 운명으로 간직하고 있는 생태주의자들의 예시를 들었다면, 다시 이번에는 ‘가벼워지려는 의지’를 지닌 마음의 지향성을 통해 그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보자. 질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 『시네마 I –운동 이미지』에서 예술가의 표현에서 중요한 요소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즉 표현주의,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그리고 색채주의(colourism)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표현주의와 서정적 추상이라는 두 근본 축으로 분류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표현주의에서 중요한 양상은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는 필자가 2부 전체에 걸쳐 설명한 마음의 낮의 체제와 밤의 시간의 대립(이를테면 카라바조와 베이컨의 이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가령 거기서 시인의 꽃과 단풍잎은 시들고 또 떨어지게 되며, 잔혹한 욕망은 자신을 숨기고자 가면을 눌러쓰고, 죄 많은 영혼은 순백의 사랑과 좀처럼 맺어지지 못한다. 반면 서정적 추상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대성의 영역으로, 들뢰즈에게 그 표현의 빛은 그가 화해하지 못한 절대적 시간이라는 ‘중력의 폭력’을 애초부터 초월하고 있다.

   사실 많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기괴한 사고방식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들뢰즈는 저 ‘바깥’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조차 바로 이 상대적 시간의 “백색”에서 파생된 불특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순수한 백색은 에밀 시오랑이 “더 이상 장애물도, 물질이나 형태나 경계선도 없는 그 천국 속에서 나는 빛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가벼운 빛’을 가리킨다. 이들의 사랑이 공통적으로 어떤 무거움을 모두 벗어버린 가벼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상상적 투사(projection)는 나름대로 이해할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무거움을 원하는 자에게는 바깥의 모든 것이 너무 가볍게 보이듯, 가벼워야 사는 운명에게는 바깥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 시인과 철학자가 본 세계와 타인의 ‘실체’는 가벼운 것으로의 이행과 분해로 상상될 수 있으며 이는 운명적으로 성립된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작가는 <당신의 표정>에서 다음처럼 쓴다.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린 무거운 나무처럼/ 나는 풍요롭고/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다.’ 그의 사랑은 너무 많은 열매의 달콤함이라는 무게를 벗어버림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고 있다. 즉 시인은 타인이라는 숱한 무거움과 이별할 수 있는 ‘불온한 능력’, 그럼으로써 오히려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는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영혼의 상대성은 그 텅 빈 마음이 채워지고 또 안정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풍족한 사랑의 절대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오랑이 ‘엑스터시’라고 표현한 성애적 관능의 충족 역시 포함된다. 그러나 앞서 섬세하게 배려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우리는 이러한 관심과 애정이 상대적인 시간이라는 ‘뿌리’의 자유마저 옥죄는 그런 이념적 폭력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016년 결성된 밴드 「새소년」의 음악은 ‘가벼운 지향성’을 가진 영혼이 사랑 또는 애착 대상 근처에서 느끼는 서정성이 얼마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눈(2020)>에서 ‘아직 어둠’인 화자는 마음을 소란케 하는 사랑으로부터 달아난 채 ‘저기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한다. 거기서 펼쳐지는 눈부신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자기 마음의 균형과 자유를 위해서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운명적 슬픔이다. 반면 <Joke!(2021)>는 화자를 숨막히게 하는 사랑을 ‘죽이기 싫지만’ 죽이고 싶어지는 충동적 위반의 정서를 드러낸다. 그때 가벼움을 추구하던 천사는 스스로 잔혹한 악마가 되는 상상에 전율하는 ‘길티 플레저’에 도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새소년의 <난춘(亂春, 2020)>에서 우리는 우리를 아프고 휘청이게 하는 사랑의 절대성을 향한 마음의 순백한 결단을 느낄 수 있다. 그 음원의 가사와 사운드는 먼저 사랑할 줄 아는 자의 용기가 듣는 이에게 '함께하는 내일'의 구원을 약속하는 바, 조바심을 내는 모든 겁많은 마음들을 기적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그렇기에 이미 밤을 통과한 그 내밀한 속삭임은 곧 사랑받는 시인의 대표곡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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