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4>
2장. 사랑에 관하여
(2) 못 찾겠다 꾀꼬리
아홉 살쯤 되었던 어느 가을날, 나는 동네에 있던 문방구에서 작은 장난감 하나를 훔치고 말았다. 그것은 16개 피스로 되어 있었고 또 당시 유행하던 포켓몬이 그려진 천 원짜리 슬라이딩 퍼즐이었다. 그때 그 물건이 왜 그만치 절실했는가에 대해 명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언젠가 동네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고, 그때 산처럼 쌓인 장난감 더미에 아무렇게나 처박힌 그 장난감을 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우리 집은 자식이 원하는 장난감을 다 사줄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질 못했다. 어쨌든 그 소심한 좀도둑은 빈 바지 주머니에 재빨리 퍼즐을 꾸겨 넣고는 아연실색이 된 채 가게를 빠져나왔다. 나는 대단히 당황스러웠고 또 격앙되어 있었다. 나는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멀리멀리 도망을 가다가 마침내 다른 동 아파트단지의 화단에 이르렀다. 훔친 퍼즐과 함께 그 충격적인 비밀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기 위해서였다. 도둑은 양지바른 곳에서 범행을 은닉하는 일이 수치스러워 애써 그늘진 구석을 찾아냈다. 그때 어루만진 흙은 창백한 피부처럼 축축했다. 나는 새 장난감을 두어 번 이리저리 움직여봤다가 원상복구한 뒤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양손은 얼음 같았고, 손톱 사이에는 축축한 흙이 껴 있었다. 그렇게 비밀은 잊혔다. 보물은 마음의 가난을 들키는 것이 아파서 오랫동안 그곳에 혼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삶에서 경험된 사랑의 밀도와 형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소유할 수 있는 성격의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사랑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사랑은 어떤 이념적인 욕망, 또 그러한 욕망의 수족처럼 쓰이는 권력의 작용과는 본질적으로 정반대의 것이다. 설령 사랑이라는 사적 실체를 현실적으로 도모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돈이나 외적 아름다움, 기술적 권력 등의 힘이 요청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종종 우리는 막대한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최후의 적수’로 사랑을 지목하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 사실 자기가 보유한 권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손쉽게 끌어올 수 있음을 맛본 방어적인 마음은, 자칫 그 전능한 소유물이 보증하는 심리적 효능을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삶을 꾸려가게 될 위험이 있다. 이따금 여러 매체에서 클리셰적인 대사로 쓰이는 ‘나한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말이 촌스럽기는 해도, 그 같은 이상한 균열은 마음이 숨긴 진실을 희미한 방식으로 비추어주고 있는 셈이다.
대중적으로 흥행한 영화 시리즈 《캐리비안의 해적》은 잊힌 마음의 심연과 그 유예자들, 그리고 이러한 불온한 인간성이 열망하는 모험적 자유와 내면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 특히 2편과 3편에는 데비 존스(Davy Jones)라는 이름을 가진 매력적인 악역이 등장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이 빌런을 통해 마음이 사랑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콤플렉스의 여러 원형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이때 데비 존스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의 변덕 때문에 상처를 받아 ‘흑화’한 괴물로 그려진다. 그는 밤의 시간을 두려워하는 영혼들을 이념적으로 꼬드겨 자신처럼 몰락을 유예하게끔 강압하는 인물이고, 자기 배의 선원이 된 영혼들에게 자신이 겪은 고초와 똑같은 고통을 주기를 즐기는 자이며, 깊은 바다의 심연을 두려워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자기가 바로 ‘바다’ 그 자체임을 고집하는 죽음의 문지기이다. 마음의 진실이 입체적으로 묘사된 이 캐릭터의 사연은 이념적 전위대의 리더 역할을 도맡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존스는 살인을 밥 먹듯 일삼는 잔혹한 냉혈한이지만, 동시에 숨겨진 자신의 사랑을 자극하는 깊은 밤의 오르골 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고독 그리고 서정성을 간직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 중에서 그는 사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도려낸 뒤 그것을 넣은 상자를 세상 어딘가에 감추어버린다.
숨기는 마음과 숨는 마음 사이에는 묘한 차이가 있다. 대개 우리는 숨은 곳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엇인가를 숨긴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 마음의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숨음이지, 숨김은 아닐 것이다. 사실 자기확신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욕망 배후에는 사랑하는 능력, 그리고 안정적인 사랑을 충족 받은 경험의 결여가 숨어있다. 행복할 수 있는 영혼의 비밀은 필시 우리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숨는 그 자리 어딘가에 놓여있으리라.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장된 삶을 살면서 너무 경직된 나머지 어디에 어떻게 꼭꼭 숨었었는지 스스로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술래에게 잡혔단 사람이라곤 본 적도 들은 일도 없는 인생의 숨바꼭질. 그러나 겁많은 우리 대신 우리를 찾으며 고초를 겪어줄 술래 하나 없는 그런 삶의 놀이에 무슨 행복이 있을까? 아무리 마음을 잃었다 해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같은 비밀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시선을 끄는 가면놀이에 열중한 외로운 마음들은 자신을 들킬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도 결코 놀이의 끝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꼭꼭 숨은 마음이 숨기기까지 잘 해낸 탓에, 그 누구도 우리를 찾아낼 수 없게 되더라도 말이다.
서로 간의 혐오적인 훈계들로 얼룩진 시대상, 특권적 권력을 향한 욕망과 인정투쟁으로 비대해진 저 자아의 얼굴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위태로운 긴장 상황에 내몰려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사랑에 목이 말라 있는데도, 이념적 욕망이나 성애적 이끌림이라는 관계 장치 없이는 좀처럼 타인의 마음에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령 그 풍경에서는 각자가 바라는 방식에 상대방이 먼저 응할지 아닐지, 소득도 명분도 없이 대치를 이어가다 결국 무산되고 마는 수많은 관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심지어 그런 양상은 인간관계에 나름 진심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사랑을 말하는 어느 아티스트는 ‘비겁한 당신들, 다 나 같아’라고 노래했을까.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만남과 모임들의 횟수를 늘리고 또 늘린다 해도 이별의 경계는 흐릿하고 희미하다. 각별한 계기도 없이 떠들썩한 안개처럼 부대꼈다 흩어져가는 관계. 그런 불안한 방랑벽이야말로 사랑하는 법에 서툰 우리네 마음이 선호하는 방식인 것이다.
강연대와 SNS에서는 부족함 없이 채워진 듯 말하는 입술들, 또 정신적 섭식장애를 자극하는 인스턴트 욕망들이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춘다. 헤아릴 수 없이 늘어선 연극적인 별빛들이 우리의 별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 화려한 야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외로운 숨바꼭질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저마다 곳곳에서 진을 치고 삶이 더 나아지기만 기다리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바깥’에서 우연히 찾아올 사랑과 더불어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가)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이따금 사랑받는 법은 알아도 미련 없이 사랑하는 방법은 잘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욕망에 의지하는 불안한 마음은 타인들을 이념적으로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연극적인 가면이 벗겨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매우 불안하고 치욕스러운 상황으로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상대방의 ‘밑바닥’을 어떤 예측 가능한 형태로 쥐어두지 않는 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념적인 권력을 앞세워 자신을 숨기지 않고도 진솔한 표현을 이어갈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묻어버린 사랑에 영영 가닿지 못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되는 열매들이란 ‘저절로 땅에 떨어진’ 그런 안전한 미래들, 우리 마음에 숨은 불행과 공허를 다 채워주지 못하는 대신 불안 없이 가져버릴 수 있는 그런 예정된 미래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