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2>
1장. 다시 세상으로
(3) 영혼의 원심분리를 조절하라
이 책이 장려하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자기 영혼에 관한 이상적인 미래이자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자의 상황에서 삶을 책임지고 있는 독자들은 마음의 운명이라는 ‘행선지’를, 자기가 그때마다 처한 현 상황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파악하고 또 조절할 필요가 있다. 계속되는 마음의 여정은 현실 상황을 초월하기 위한 권력이나 혹은 이념이라는 ‘목발’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는 기초를 재활해두기 위함이지, 그 도구적 요소들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사는 삶을 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굳이 그런 미래를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만약 영혼의 빛을 향한 이상론이 당장의 삶을 그림자로 만드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속 편한 소리’가 되지 않을까? 앞서 이념이 상대적인 시간을 임시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 이미 암시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초월을 꿈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활기차고 풍족한 안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을 넉넉하게 가져야만 하는 법이다. 당장 그날 쓰고 이튿날 사라질 그런 앎과 재화만 손에 쥔 채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을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현실적 가난과 마음의 가난에서 솟아나고자 하는 사람은 삶에 주어진 여러 수단들을 자기 상황에 맞게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 마음에 감추어진 필연성이 상대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저 ‘바깥’이라는 절대적 시간과 우리가 맺는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오르지 않는 한 그 비밀은 좀처럼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최소한의 커리어 안정성이나 경제적 여유 없이 떠도는 삶, 사랑받는 경험과 사회적 존중의 충족 없이 결핍만으로 채워진 삶에서 수축된 마음의 매듭을 이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의 2부의 말미에서 보았던 화가 반 고흐의 삶은 하나의 기적적인 사례인 동시에 뚜렷한 현실적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특정 목표 과제에 대한 책임 있는 몰입 없이 개인의 삶이나 사회 수준에서 지속 가능한 돌파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 절대적인 시간이 해양 조류를 따라 표류하는 선박이라면, 상대적인 시간은 그 배에 오른 선원들이다. 만약 당장 전방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게 될 위험 속에서도 선원들이 ‘워라밸’의 꿈에 도취해있다면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인 결말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 모든 여정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마음 안팎의 균형을 꾸준히 조절하는 일이다. 자아의 관성에 의해 깊은 내면이 계속 유폐되는 ‘영혼의 원심분리’ 상태를 탈피하고픈 독자들이라면 삶의 주객이 전도되는 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 곧 현재 나의 마음이라는 술잔을 초과해 술을 계속 따라버리는 삶의 불균형을 조절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가령 처리해야 할 일로 인해 이미 스트레스나 압박감이 과포화 상태인데도 관성처럼 다음 일을 또 벌리고 만다든지, ‘바깥’에 대한 불안이나 특정 직무가 주는 역할적 효능감이라는 타성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맞지도 않는 직장에 계속 다닌다든지, 가난한 마음의 실체를 가려줄 연극적인 연출이나 ‘품위 유지’의 하한선(下限線) 및 적정궤도 유지에 과도한 품을 들인다든지, 순전히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원해서 또는 착한 사람 같은 것이 되고 싶어서 타인 곁에 머무른다든지, 혹은 이전에 했던 교활한 말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망각하고자 탈주해버린 과거를 단지 ‘기워 입으려’ 애쓰는 그런 이념적 습관 등은 불균형한 삶의 주된 요인들이다.
문제는 이 같은 타성적 습관이나 충동 없이는 잘 진정되지 않는 삶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균형화하는 일이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잠깐 인내심을 발휘하고 나머지 삶을 건강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예된 몰락과 임시적인 위안이라는 쳇바퀴를 굴리면서 제자리걸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흔히 자기계발서에서나 볼 법한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저는 전자입니다’라고 답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마음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할 때 해결책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삶은 그 단순한 결심을 자신의 것으로 실제로 체득하기 위해서 아주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마음속에 폐쇄적인 이념의 습성이 매듭지어지게 된 데는 절대적 시간에 맞선 ‘마음의 적응’이라는 뚜렷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의 2부에서 마음이 갖는 상대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저마다 밤의 시간(절대적 시간)이라는 미궁의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말했다. ‘바깥’의 시간에 의한 충격과 애증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마음이 상황 주도권을 얻기 위해 ‘바깥’과 형성한 유희적인 애착관계는 대단히 열정적이면서도 결여적 · 트라우마적인 그런 충족 관계이다. 긍정적인 면을 보다 강조하자면, 그 시기에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충만함이나 불안감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윤리적 기저층이 형성된다.
이렇듯 긴장을 일방향적으로 조절하는 목적에서 수축된 저마다의 비밀스런 습관을 감안하지 않고 특정한 삶의 이상을 만인에 투사하는 것은 다소 철없는 꿈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다분히 강제성을 띠었다고 소개한 철학자 하이데거의 패착이기도 하다. ‘폐쇄된 어떤 것의 개방’을 뜻하는 결단성(Ent-schlossenheit) 내지 ‘본래적인 양심의 부름’을 각자의 존재에 요청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물론 니체나 들뢰즈의 그것과는 달랐다. 즉 그것은 타인의 마음이라는 각자 영역에 대한 약탈적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파괴적인 동화(同化)의 의지를 ‘바깥’ 그 자체의 숭고성과 교묘하게 뒤섞고 얼버무리는 그런 전쟁 우주론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이념은 저마다 조개류처럼 안으로 굽는 마음의 불균형을 ‘자율적으로’ 열어젖히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낮의 체제가 밤의 시간과 맺는 관계가 적절히 치유되고 또 재활될 수만 있다면 마음의 폐쇄성 문제는 알아서 안팎의 균형 상태로 접어든다. 이것은 마치 절단된 신체 부위를 임시 봉합하는 조치가 일단 이루어지고 나면 기적적인 자연치유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
한편 이처럼 거듭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예지된 저 미래라는 ‘기적’은, 사실 우리의 상대적인 시간 안에 잠재된 어떤 상상적인 의지의 필연성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더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비록 텅 빈 마음이 현실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에서 솟아오르기 위해 성급하게 내면화한 ‘답정너 이념’일지라도 그 선택에는 늘 어떤 운명적인 미래 지향성이 내재되어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는 항상 우리에게 숙명적인 초자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따라가도록 이끄는 어떤 창조적인 초자아가 있어서, 그 같은 몰입의 내밀한 원천이 우리의 삶을 들어 올리고 또 넘치는 심리적 활력을 준다. 어떤 이념적 선언문들이 종종 거기에 깔린 논리적인 모순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도시화와 기술적 근대화로 인한 ‘정신의 황폐화’를 비판적으로 여기는 생태주의자들의 공통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적 슬로건에 호감을 갖는다는 점이다. 윤리적 민감성과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 가치관에서는 채식주의나 동물권 논쟁, 환경 및 기후 문제, 비폭력과 소수자를 말하는 탈성장 담론, 자족적 생활과 심미성 측면에서의 미니멀리즘, 돌봄과 환대를 위한 공간 요구, 순박한 공동체의 도덕적 건전성, 공정무역과 그린 이코노미(Green Economy), 기술적이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도시 및 주거계획 등 다양한 의제들이 어떤 ‘자연 친화적 정신’을 중심으로 합류한다. 1854년에 출간된 에세이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현대 생태주의의 정신적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연 속에서의 자급자족과 더불어 일종의 ‘느림과 빈자의 미학’이라고 말할 법한 견해들을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생태적 사고의 실질적인 공헌과 그 수혜내용을 고맙게 여긴다. 그러나 그 윤리적인 생활양식을 직접 내면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 같은 정신의 전지구적인 연대 가능성에 영혼이 깊게 감화되며, 인간의 건강한 본성 혹은 회복된 본질이 정말로 ‘자연적’이라는 이념적 확신을 갖는다. 대도시의 현실 안에서 그들의 소속은 평범한 직장인, 학자, 언론인, 건축가, 사회적 기업가, 비영리 활동가, 기술공, 에세이스트 등 다양하지만 서로 간에 이상한 공명의식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거기서 순환논리를 띠는 ‘자연적 본성’은, 약간 철학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관념(‘내면’)을 실재(‘바깥’)와 혼동한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긴장과 모순을 보인다. 예를 들어 생태주의자들은 사람이 목재로 집과 가구를 만들고, 친환경적인 음식을 지향하고, 반려동물의 자유와 복지를 사랑하고, 인간의 ‘인위적인 과욕’을 내려놓는 문제에서 흡족한 자연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서 내면화된 ‘자연’이란, 이를테면 자연 선택이 잔혹한 약육강식의 진화를 촉진했다는 것, 무리생활을 하는 포유류들이 장애가 생긴 동료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 여러 식물과 곤충 그리고 어류들이 거짓이나 속임수를 생존 전략으로 갖고 있다는 것, 숲속의 자연은 엄청난 숫자의 벌레들과 공존함을 의미한다는 사실 따위를 포용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생태주의자의 정신적 자연은 절대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마음의 상상력, 곧 상대적인 시간의 창조적 구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감수성이 촉발한 논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논리적 모순과 딜레마(이를테면, ‘자연 상태’가 아니라 첨단 과학이 기근과 전염병을 해결했다는 사실)는 영혼의 가치부여 작용을 자아가 현실 논리에 끼워 맞추려고 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 같은 이념적 집착은 사실 자아의 불필요한 분열이자 자기검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지만, 우리는 마음이라는 사(私)를 현실이라는 공(公)과 적절히 구분하면서도 충분히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