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3>
2장. 사랑에 관하여
(1) 잊혀진 아픈 이름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 열심히 말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어설프고 지지부진한 일도 없는 듯하다. 이 책이 쓰여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삶의 시간이 통과한 갖은 어리석음 덕분이다. 한편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곧 어리석음의 무한한 근원들에 대해 묻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대개 사랑에 관한 한 명석함을 과시하는 발언이란 곧잘 취약한 마음의 밑천과 임기응변적인 유치함을 드러내고 만다. 반면 마음의 가난과 경험적 무지 앞에 진솔했던 사람들은 종종 사랑의 경험으로부터 관계적 현명함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영원토록 그들을 속여 넘기고, 누구보다 어리석고 평범하다는 사람들이 가진 유한한 삶의 심장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일으켜 세운다.
일찍이 많은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사랑(에로스)에 대해 논한 플라톤의 작품 『향연』이 그랬고, 오늘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같은 저술이 그러하다. 그러나 번뇌를 멀리하고 또 무한한 신념을 향해 너무 쉽게 가지를 뻗는 철학자들의 사랑이란 얼마나 자주 뻣뻣하고 겁많은 사랑인지! 그 같은 설명들이 제시하는 사랑의 ‘초월적’ 속성이란 마치, 술래잡기에서 긴장감을 낳는 규칙일랑 전부 무시하기를 고집하는 깍두기가 정의한 놀이의 본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같이 규정된 사랑은 항상 모종의 ‘정화된’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컨대 프롬은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합일 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신에 대한 사랑’과 같은 일종의 보편 이념보다는 서로의 부족함과 차이를 채워주고 또 지지해주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랑을 ‘배타적 이기주의’로 낙인찍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황당한 견해는 그리하여 연인이나 부부간의 성애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하는 성직자의 고해성사 요구와 겹쳐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러 고루한 견해들의 대척점에 서서, 필자는 사랑의 경험 그리고 사랑을 둘러싼 욕망이 무엇보다도 마음의 온갖 방황과 모순의 진원지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해, 불필요한 자아의 분열과 어리석은 욕망의 순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의 문제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나는 ‘신에 대한 사랑’이 통상 마음에 불어넣기 쉬운 어떤 보수적 성실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이 이념 혹은 숭고(Erhabenheit) 같은 표현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를 이미 예견했을 것이다. 그 같은 형태의 사랑은 타인의 영혼을 세심히 살필 줄 모르는 권고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관계의 규정 및 의미 주도권을 타협할 줄 모르는 방어적인 사랑, 내면의 우주에만 머물기를 고수하는 마음의 불균형을 손쉽게 메꿔주는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그치기 쉽다. 왜냐하면 무한한 우주적 원리나 사명에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는 대개 삶의 유한함이 주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또 갖은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열등의식과 상상적 추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이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사랑이 이따금 타자와 윤리를 말할지는 몰라도, 실제 당사자는 밤을 멀리하며 심신(心身)을 수양하는 자기자신에 관한 이해로부터 먼 곳까지 타자를 배웅하기 어렵게 된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한 개인적이거나 서정적인 단상들을 풀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마다 간직하고 있을 모든 기쁨과 슬픔의 비밀들은 오롯이 독자 자신의 이야기이다. 또 사랑이라는 깨지기 쉬운 마음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려면 아마 별도의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다. 준비가 덜 된 것은 미뤄놓고 싶은 조바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이 주제가 다분히 버겁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내가 이 주제를 회피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마음의 치유라는 문제에서 중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밤이슬을 마시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 그것 앞에서 소심한 우회로를 찾는 자기 마음의 동요를 먼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경험된 사랑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슬픔과 감미로움, 충실성과 동상이몽(同床異夢), 응석과 헌신, 도피와 인내심, 몰락과 소생, 착취와 자기희생, 용기와 비겁함 같은 중요한 관계 경험들을 통과한다. 그리고 마치 심야의 라디오처럼 우리를 밤의 시간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사랑, 즉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언어들을 속삭이게 하고, 갖은 기다림과 조바심을 참고 견디게 하는 이유가 되며, 또 그 같은 성장통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키가 밤사이 더 자라도록 해줄 수 없는 그런 사랑은 얕은 뿌리를 가진 것이리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만이 모든 삶의 의미인 한편,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조차 잘 느끼지 못한다. 연인 간의 사랑에는 마음의 문을 닫았더라도 가족애나 동료 간의 돈독한 우정을 엄청나게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의 희망이 일종의 사치여서, 그저 명절이나 공휴일에 혼자 있는 일만 면해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또 과거 애착 대상과의 관계에서 불행을 경험한 어떤 사람들은 새롭게 시도된 관계 속에서도 같은 불행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그들은 용기가 부족하거나 또는 애착 대상과의 종속적 관계와 연관된 어떤 퇴폐적 자극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까닭에, 실제로 채워지길 바라더라도 익숙한 불행의 덫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불행에 관한 서사가 무수한 줄기들로 분화된다 해도 그 이야기가 꿈꾸는 행복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베개를 둔다. 그리고 그 소망의 끝에는 한정 없는 다정함이 놓여있다.
전 생애에 걸친 불행과 행복, 그리고 균형 잡힌 삶의 운신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필시 사랑의 경험일 것이다. 만약 어떤 마음이 손상을 입고 불균형한 상태에 있다면 최고로 긴급한 것은 항상 내리사랑을 경험하는 일이다.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뿌리가 흠뻑 다 적셔질 정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인정이나 욕망, 애정을 유도할 수 있는 어떤 역할조건을 위해 중요한 무언가가 포기되고 있음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애쓰며 위태롭게 버티고 선 마음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영원처럼 포기되었던 바로 그 아픈 기대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 같은 과제에 비하면 타인이 우리의 윤리적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조차 단지 존엄한 삶의 필요조건, 한갓 최소한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