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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Sep 18.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1>

1장. 다시 세상으로

(2) 삶에서 이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래서 설령 나 자신이 이념적인 사고방식에 면역이 생기고 또 독립된 영혼에 가까워졌다 한들, 가까운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주는 스트레스나 고통을 관리하는 것은 여전히 간단치 않다. 과거 우리는 부모와 열정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애증의 고통을 감내했었다. 부모의 기쁨과 인정, 분노나 공격성, 방치나 멸시 따위가 우리 자신의 존재 및 행동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동일시 감각은 우리의 내면 아이에게 뿌리 깊은 흔적을 남긴다. 어떤 내면이 ‘바깥’의 사회적 스트레스에 취약하게끔 만드는 부모의 성향은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과소비나 방랑벽이 심하고 자식을 방치하는 부모, 배우자나 자녀에게 폭언 및 폭행하는 부모, 너무 권위적이거나 칭찬에 인색하고 자녀를 습관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부모, 자녀에게 감정적 의존도가 높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자녀의 장래에 투사하는 부모, 신경질이나 분노를 잘 참지 못하는 부모, 자녀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깎아내리는 부모 등이다. 그때 취약한 마음은 다음과 같은 ‘할 말’을 망각된 묵음으로 가지고 있다. “나한테 왜 그렇게 했어요?”

   물론 이 같은 경험적 요인은 사교적 삶을 둘러싼 마음의 태도나 사회적 스트레스 면역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 즉 사람들의 일상적 정서는 그러한 사회적 유대관계를 계속 열망하고, 당시의 느낌과 수시로 과민한 전쟁을 벌이고, 또 그 같은 느낌에 무뎌지거나 익숙해가던 모든 과정 가운데 이미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은 감정적인 뇌관(雷管)이 화재경보기처럼 쉽게 건드려지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는 무리와 늘 어울려야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 한편 자아가 사회적인 연출에 불균형한 수준으로 신경을 쏟는 까닭에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는 경우도 있다. 타인의 이념과 그 욕망을 관철하려는 몸짓의 의미를 모를 때 상황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자신과 타인의 배후 사정을 알게 된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 심리 전문가들은 통제할 수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될 때는 일단 현장과 떨어지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불안해하는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상황 대처의 첫걸음인 것과 같다. 이 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흔히 부모로부터 공간적으로 독립해 혼자 거주하기 시작한 뒤부터 비로소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밖에서는 탈 없이 적응하고 지내던 사람일지라도 애착이 가는 대상 근처에서는 쉽게 내부가 건드려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마음은 곧잘 짜증이나 화를 내게 되고, 또 깊은 피로나 우울감을 느끼는 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애증관계가 주는 염증을 절연하고, 이념적인 특정 커뮤니티를 안전한 내집단으로 삼고, 또 대상을 ‘씹거나’ 혹은 미워하는 냉전(冷戰)의 시기 자체는 내면의 긴장이나 괴로움을 완화하는 차원에서 마음이 취하는 주요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외부로부터 자극되는 결핍을 통제적인 상상과 심리적 투사(projection)를 통해 해소하는 반복은 세상에 나온 마음이 일차적으로 좇게 되는 숙명적 필연이다. 그 같은 마음의 작동은 특정 대상을 희생양으로 선정하고 또 파괴하는 군중의 모방 욕망과 집단적 카타르시스 현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타인들이 갖는 이념 일반을 평생 혐오했고, 동시에 세상을 해석하는 자신의 이념적 무한에 기초해 그의 공격적 감정을 다스리고 또 추슬러나갔다. 미셸 마페졸리 같은 철학자는 이처럼 모든 마음의 숙명에 잠재된 광란성 혹은 공격적 아노미에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거기서 비롯되는 사회적 역동성 혹은 무질서를 ‘건강한 것’으로 파악했다. 니체 혹은 들뢰즈의 긍정론과 근본적 일치를 보이는 이 같은 견해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념은 자신과 타인의 삶으로 하여금 불건강한 정신적 ‘덫’에 무기한 발을 들이게 만든다 하더라도, 일단 그 투사적 몸부림은 내면에 간직된 상대적인 시간이 ‘바깥’에 의해 붕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이상은 그 어떤 초라한 삶이라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초월적 권한과 평안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따라서 비록 공(公)적인 시선은 이념적 욕망이 현실화할 수 있는 폭력과 무질서 앞에서 차갑고 냉정한 머리를 고수해야 한다 해도, 우리의 사(私)적 시선은 여전히 그 같은 몸짓의 인간성을 포용하는 뜨거운 가슴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두 시선은 분명 양립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기에는 내 마음 하나 건사하기도 괴로운 삶이지 않은가? 씹을 수 있는 세상의 면면이란 한도 끝도 없는 법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책임질 생각이 없는 인간들을 우리가 왜 연민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시간과의 본격적인 화해 과정에 오른 독자들이라면 결국 계속되는 삶 가운데 자신이 느끼는 고독감을 다루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취약한 마음이 자신을 의탁하는 일종의 ‘치트키’인 저 이념을 포기한 삶은 이제 어떤 종류의 사교성을 선택할 수 있을까? 사실 허무적인 감정 혹은 염세주의가 마음을 자극하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념적 초월성을, 즉 우주의 역사와 타인의 마음에 내포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다는 이상을 놓지 못한 때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 이 책의 주제에 점점 더 친숙해가는 독자를 괴롭히게 될 사안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로 좁혀질 것이다. 즉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또 생각하면 좋을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나의 마음을 어떻게 관리해나갈지’가 그것이다.

   여러모로 이 사안은 아직 나를 괴롭히는 주제이기에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이념적 욕망이 가진 추진력이 우리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으리라. 한 차례 언급했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불안 혹은 이념적 믿음이라는 추동력 없이는 뚜렷한 방향으로 삶을 움직이지 못한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나 에밀 시오랑 같은 짙은 염세주의자들, 또는 이념 주체에 감춰진 모순과 개별 영혼의 존엄성을 깨달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행동에 관한 내재적 동기가 파괴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떤 정책이 입법되거나 사회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군가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정말로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뉴스를 틀면 매일 만나는 의회식 민주주의를 보면서 고개를 젓고, 혀를 차거나 욕을 하고, 환멸을 느끼다 깊은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시민들은 세금을 내고, 투표권을 행사하고, 여러 사회적 기업과 활동단체에 후원금을 낸다. 그리고 실제로 유효한 정치적 변화는 ‘목숨을 건’ 이념적 동기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타인의 삶을 일으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므로 그 양상을 삶의 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착잡한 심경을 피하기 어렵다. 만약 어떤 마음이 이념적 믿음 없이는 대화를 이끌기 어려워한다면, 이는 그가 아직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한 마음의 숙명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당사자를 얼마든지 치졸하고 악랄한 기회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 그간 나는 내가 믿고 따르고 싶어 했던 여러 지인 및 어른들과의 관계가 이념 때문에 망가지는 경험을 수없이 지나왔다. 그들 이념의 영향권 아래 놓일 때는 그토록 호의적이고 온정적이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념에 위협적일 수 있다고 판단된 대상에게 얼마나 싸늘하고 야비하게 변화할 수 있는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한편 순하고 착하다고만 여겼던 사람들이 특정 종교나 담론의 이념을 내면화한 뒤 순식간에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사람의 대다수는 남몰래 비정상적인 수준의 사회적 고통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던 경우다. 영화 《다크 나이트(2008)》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다음처럼 말한다. “광기란 건, 알다시피 중력 같은 거야.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그때 약한 마음은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과 자유를 되찾았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의 과거가 하나의 거대한 모순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취약한 마음은 스스로 걸음을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념적인 믿음이 주는 초월이 사적인 삶에서 반드시 나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실제로는 종교가 없지만 한 선생님과 수년째 성경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이 선생님으로 말하자면 내가 무신론 관련 책들을 읽던 시절 나를 공부방에 꼬드기는 데 성공한 사람으로, 요즈음에는 나이를 드시면서 머리가 희끗해지셨다. 당신께 죄송한 점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마 이 말을 들으시면 조금 실망하실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종교에 반감을 갖지 않게 된 건 모두 선생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내가 그 일대일 선교원에 다닌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실망 속에서도 변치 않는 온정을 느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그분처럼 타인에게 일관적으로 따뜻하고 또 과묵한 웃음으로 타인을 섬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언제 방문하든 나는 그곳에서 따뜻한 차와 음식으로 가족처럼 환대받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일할 때나 책임이 지워진 경우를 제외하면 무척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또 시간 계획도 유연한 것을 좋아하기에, 아마 신실한 신앙인인 선생님 입장에서는 자주 당황스러우셨을 것이다. 게다가 함께 공부하는 동안 나는 성서에 나타난 무수한 구절들을 가지고 다양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선생님이 어떤 수동적 공격성이나 강압적인 기색을 내비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선생님과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성경 구절에 밑줄을 그을 때, 그리고 가끔 실눈을 뜨고 선생님이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나는 복잡한 생각이 든다. 거기서 나는 하나의 삶이 사랑의 이념 속에서, 그것도 온전히 자기 안에서 완수되어 가는 과정을 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면 자기 마음을 다스리려고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 홀로 절간이나 성당을 찾아 울음을 터뜨리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의 이념적 믿음이 가진 민낯은 대체로 섬뜩한 것이다.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이 좇는 길이 실은 막다른 길일 수 있음을, 그들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도 타인에게 비밀에 부치려고 한다는 사실에 있다. 아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리라. 나 역시 대학원의 한 일원으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이 학문이 가진 정신적 경향이나 여러 난점들을 당장 첫학기부터 신입생들에게 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새삼 잔혹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멋모르고 커리어를 결정한 사람들이 잘못된 곳에서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 같은 침묵은 세상의 모든 곳에서 일상처럼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너무도 많은 삶이 소모품처럼 쓰이고 잊혀져간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런 아픈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언젠가 우리들은 재회할 수 있을까?

   그 중심이 잘 변화하지 않는 삶에는 일종의 꼬리잡기처럼 무한히 순환하는 이상한 역설이 있다. 마음은 사실 그가 늘 염려하는 어떤 ‘바깥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간 고수한 어떤 습관만 가지고서는 그것을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 문제가 구체적으로는 두발자전거 타기든, 자기계발이든, 사회적 성공이든, 지적인 깨달음이든, 혹은 사랑의 성취이든 상관 없다. 삶이 어떤 낯선 과정을 거치면서 그 문제는 실제로 해결되거나 혹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념적인 자아 안에서는 언제나 그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어렸을 때 두발자전거를 혼자 타는데 성공했든, 혹은 두려움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두발자전거가 이미 시시한 사람은 ‘그걸 못 탈 수가 있나?’, ‘그게 뭐 대수라고’ 같은 반응을 보인다. 반대로 자전거 타기가 싫어진 사람은 ‘저게 재밌나?’, ‘어차피 차를 타면 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러한 사후적 자기 인식에는 과정 경험에 대한 이해가 소실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당연하고 또 자명한 것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확신이라는 모순적 생성물들, 그리고 그 부조리함에 몸을 숨긴 필연이라는 역설. 어떤 독자들은 이미 1부에서부터 반복된 이 같은 설명이 여전히 까다롭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관련 내용이 ‘전문적’이어서라기보다, 그 살아있는 역설이 우리 마음에서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구조로서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같은 역설은 종종 솔직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든다. 가령 그 역설은 인터넷에서 정치적인 설전을 벌이다 내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을 때, 어떤 관계에 불만이 있는데도 딱히 지적할 명분이 없을 때, 주변 사람이나 연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다 일이 틀어질 때,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믿는 조급함이 떳떳지 못한 삶을 지속시킬 때, 깊은 공감을 원한다고 느끼다가도 타인이 우리를 깊이 아는 일이 거북해질 때, 연극적인 태도나 매혹 끝에 우리에게 넘어온 사람에 대한 관심이 한순간 사그라들 때,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도 그 같은 행동을 멈출 수가 없을 때 우리의 삶을 덧없이 헛돌게 만들 수 있다. 그때 마음은 ‘일단 확신부터’ 찾고 보는 자아의 습관에 의해 자신의 삶이 걷잡을 수 없이 휘둘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칸트나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이러한 사건 현장을 ‘내감(innere Sinne)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념이라는 ‘피고인’에 대한 인권변호사를 평생 자처했던 들뢰즈에게 그 같은 삶의 양상은 각별한 관심사였다. 한편 우리는 들뢰즈가 실존주의자로서 품었던 숙원이, 바로 타인의 마음에 대한 월권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고발할 수 있는 소송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 무력화하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요컨대 세상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집 및 해석 권한을 가져오고 싶어하는 자아(‘나’), 그리고 그의 깊은 내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불일치에 대해 “누구나 다 그렇다. 또 그래야만 한다”는 주장을 승소로 이끄는 것이 이 철학자의 사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사건 현장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을 알려준다. 즉, 만약 삶이 이념적인 욕망대로만 실현된다면 잃어버린 마음의 회복과 성장은 영영 그곳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삶에서는 ‘원하는 대로 안으로만 굽은 인생은 결코 원하던 것에 닿지 못한다’는 꼬리잡기가 영원히 반복되고 있다.

   바꿔 말해서 이는 마음이 바란다고 믿는 어떤 변화가, 실제로는 바로 그 같은 욕망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어려서부터 외부 자극에 민감한 아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 내면의 결핍에 대한 부모의 반응과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상황 주도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같은 행위의 형식이 반드시 그가 실제로 바라는 어떤 내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무언가가 뜻대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런 아이들은 부모를 조작하거나 괴롭힐 수 있다고 믿는 말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수행한다. 가령 체면을 중시하는 부모와의 외출에서 소란을 피우고, 하지 말라고 한 짓궂은 장난들을 일부러 저지르고, 업어주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부모가 과거에 칭찬했었거나 감탄할만한 행동을 연극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그 예시들이다. 그때 많은 부모들은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아이에게 반응적인 태도를 내비친다. 예컨대 아이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아이를 물리적으로 제압한다든지, 아이와 말다툼이나 기싸움을 주고받는다든지,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가 뜻대로 하게 해준다든지, 씩씩거리면서 “네 마음대로 해” 같은 경고를 던진 뒤 아이를 방치한다든지, 아이를 품에 안고 “미안해” 같은 말들을 쉽게 한다든지, 또는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너무 멋지고 예쁘네” 같은 과장된 표현들을 남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 반작용적인 피드백은 아이가 부모를 이리저리 뒤흔들 수 있다거나, 혹은 서로 간에 열정적인 편집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그런 이념적 믿음의 순환을 강화해버리고 만다. 그때 아이는 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이 안으로 굽는 의도적 순간마다 즉각 반응해버리는 그런 ‘절대적 시간’을 학습하게 되는 셈이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울고 떼를 쓸 때마다 그것을 충족해주는 방식으로 아이의 ‘요구’가 채워지고 또 진정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계속 난폭해지고, 또래 아이들과 독립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면서 도피적으로 되며, 동시에 자신의 감정적 민감성을 통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마치 부모에게 ‘왜 내 요구에 매번 반응했느냐’고 원망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 경우 실제로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요소의 동시적 충족이다. 즉 아이가 편집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할 때 휘둘리지 않는 굳건함을 보이면서, 또한 동시에 아이에게 고유한 내면적 요구에 반응하고 또 꼭 끌어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유연하고 인자한 사랑인 것이다.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이 내면의 상대적인 시간은 애초부터 ‘바깥’의 자극에 대해 안정적인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다. 따라서 그런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타인에게서 시간에 관한 지속적 안정감과 충족감을 뿌리내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우리는 너무 편집적이거나 혹은 좌불안석인 타인의 사랑이, 본래 의도와는 달리 마음의 안팎에 관한 우리의 자율적 통제감각을 망가뜨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내면 아이의 충동은 자신의 마음이 실제로 원하는 바를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황을 긍정적으로 뒤집고 또 통제하기 위해 즉각 잡아당길 수 있는 지푸라기를 내면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부모라는 ‘바깥’은 아이의 마음이라는 내면과 긴밀히 소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마치 행성의 궤도를 공전하는 위성처럼 아이의 모든 반응에 일일이 대응해주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마음의 ‘바깥’을 방어적인 내면 쪽으로 일방적으로 끌어오도록 돕는 권력적 방법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닌, 마음의 내부가 사회적 관계나 시련이라는 ‘바깥’에 떳떳하게 다가서고 또 교섭할 수 있는 존엄하고 열린 방식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사자의 마음은 장기적으로 삶의 정신건강을 해하는 습관, 즉 어떤 착잡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단번에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이념적 의존성을 떨쳐내기가 어렵게 된다.

   그런데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온갖 이념이 잘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리 한 현실에서 전문가인 사람일지라도, 타인들이 꾸려가는 삶과 죽음의 또 다른 영역에서는 무지하다는 불가피한 한계 때문이다. 천문학자라도 자기가 든 보험약관을 일일이 감안하자면 머리가 아플 수 있다. 의료계 종사자도 연말정산이나 세금법이 혼란스러울 수 있고, 또 부동산법에 무지해서 전세 사기를 당하는 기상청 관계자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나 죽음, 이질적인 가치나 새로운 경험 같은 문제들 역시 중대한 무지의 영역일 수 있다. 반면 유한한 존재인 사람의 마음은 살아가는 동안 ‘바깥’이라는 시간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는 상호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따라서 그 같은 전체성에 대한 열망이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정치적 이념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 이념적인 마음은 어떤 성과를 내는 문제 또는 특정 분야의 역할 수행에서 정도(正導)를 걷는 법을 익혀나감으로써 삶의 건전한 효능감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결국 패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된 주제로, 이 책의 3부 3장에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운동 경험이 있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정직하게 수행한 ‘1회’를 얻어내는 것이 성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계기인지 알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형식이나 혹은 언제든 부풀릴 수 있는 횟수에 천착하는 것보다는 내면적인 직접성을 중시하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가 처한 삶의 현실적 영역에서 상황을 너무 간단히 초월해버리는 믿음의 습관에 익숙한지, 혹은 상황과 하나씩 맞닥뜨리면서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는 상태에 가까워졌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무수한 스포츠 장르가 가진 매력은 아마도 상대방에 대한 극복이나 패배가 피불능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데 있으리라. 마음의 문제가 아닌 현실 층위만을 고려한다면 스포츠는 말 그대로 ‘어리석은’ 열정일 뿐이다. 가령 어떻게든 싸워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체스나 축구 경기, 양궁 사격이나 종합 격투기(MMA)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실 현실에는 언제나 약속된 권력(이를테면, 돈이나 지식)라는 ‘치트키’가 존재한다. 한편 마음 또는 삶의 입장에서는 이념이 바로 그 ‘치트키’일 것이다. 그러나 이념을 포기한 영혼은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자신의 표현에 정직하게 되며, 그때 삶의 경험은 마음이 처한 숙명을 서서히 고유한 운명으로 이행시킨다. 분열된 자아와 깊은 내면은 점점 더 화해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운명적 변화는 삶과 시련의 의미를 설정하는 자율성이나 사랑에 관한 태도 등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극명한 격차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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