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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Sep 15.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제3부 <20>

1장. 다시 세상으로

(1) 마음에도 재활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짧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혹자는 지금껏 나눈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자축할만한 해방에 이르렀다고 느낄 것이다. 가령 존엄한 자유로 향하는 마음의 관문을 감시하던 실존주의자들의 격언은 이 이상 우리의 여정을 추적해올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즉, 어떤 독자들은 2부의 목전까지 독자들을 뒤쫓다 저 ‘바깥’의 시간이라는 홍해 바다에 수몰되어 사라져간 이집트 병사들을 바라보며 이상한 통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해방이라는 것도 계속되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겨우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하다. 마음은 다만 이념이라는 덫 혹은 바이러스에 취약한 숙주 상태에서 벗어나 상당한 면역력을 얻었을 뿐이고, 1부에서 언급했던 현실적 공(公)과 이념적인 사(私)의 변별이 이제는 현실과 삶이라는 외부-내부의 본래적 구도로 변경되었을 따름이다. 이제 세상의 신념 바깥에서 우리가 끌어안게 되는 것은 삶의 의미의 거대한 불모지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여정에서 씨앗을 뿌리고 미래를 일구는 과업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

   이 책의 3부는 저마다의 내면이 처해 있던 숙명적인 필연을 이제 하나의 운명적 필연으로 전환해나가는 삶의 탈피과정을 보조하려는 의도에서 서술되었다. 비유하자면 그 과정은 낡은 차량에 새로운 연료만 계속 넣어준다거나 혹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몇몇 부품만 고쳐서 계속 작동시키는 게 아닌, 왕복 및 회전 운동을 하는 엔진 자체를 서서히 교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마음의 숙명은 외부의 타율적 요인들과 우연적인 조건에 의존적이거나 이리저리 부화뇌동(附和雷同)할 수밖에 없는, 덧없는 집착에 발이 묶인 그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반면 마음의 운명이란 그 같은 외적 경험들을 자생적으로 분별 및 소화하고, 또 모든 경험들로부터 스스로 유연하게 배워나갈 수 있는 그런 ‘준비된’ 상태로 이르는 길을 가리킨다. 그 길은 우리의 내면이라는 상대적인 시간이 저 ‘바깥’과 맺어온 자기 구속적 관계 방식, 그리고 거기에 감춰진 이념적인 집착이 개선된 삶의 구축을 향할 것이다. 삶의 운명에 근접할수록 우리는 ‘바깥’에 대한 과민한 역치(閾値) 반응을 조절하는 ‘마음 근육’이 전방위적으로 생장해감을 느낀다.

   그러나 건강한 삶의 자율성을 되찾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의 ‘재활’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이미 마음이 입은 깊은 내상(內傷), 그리고 안쪽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이념적 습성을 그대로 방치한 채 어떻게 선명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재활이란 2부에서 이미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시간과의 화해를 가리킨다. 그것은 마음 안팎의 중심축 또는 균형을 근본적으로 다시 조정하는 일이다. 즉 재론하자면 그것은 깊고 느릿한 휴식, 영혼이 바라는 근원적 격정과 안심(安心)의 충족, 습성화된 시간 리듬 및 행동 반경의 의식적 개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관계망의 재구축, 이념을 멀리하는 대화법과 이념적인 사람들과 섞여 사는 방법, 방어적이지 않은 형태로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 진정성 있는 자기효능감의 회복, 정직한 노력 및 현실에 비추어 본 자기 직시 등을 총체적으로 도모함을 의미한다. 독자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겠지만, 이 같은 마음의 재활은 여유가 날 때마다 틈틈이 전개할 필요가 있다. 마치 우리가 정기적인 일과 이외에 짬을 내서 자기계발과 취미생활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마음 안팎에서 일단 일정한 회복이 일어나면 삶과 현실을 보는 시야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지니는 중심 주제 및 형식적 구성 측면에서 봉착할 수 있는 어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는 사람마다 개인적 성향이나 치유 단계, 그리고 타인에 관한 이해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가령 어떤 아이들은 나이가 겨우 열 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인간관계에서 경이로울 만큼 성숙한 경우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선생님과 수평적으로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도 예의 바른 대화를 나누고, 경청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학습과 취미생활 면에서 모두 높은 흥미와 몰입도를 보이고, 또래 아이들을 격려하거나 갈등을 중재하는 방법을 알고, 자신의 실패를 진지하게 수긍하며, 심지어 암울한 상황에 대한 마음의 회복 탄력성도 뛰어나다(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음 클리닉’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일생 동안 이 같은 관계 방식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같은 차이는 분명 우리가 겪었던 유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마음이 느낀 위협이나 욕망에 대처하는 여러 방식 속에서 ‘바깥(절대적인 시간)’과 맺는 관계가 다소 어그러지고 또 위축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불행이 촉발된 과거 원인을 둘러싼 2부의 접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례적 고유성을 감안하는 동시에 재활의 보편적인 방향을 제안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개인 성향을 둘러싼 간극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내가 만난 아주 순박한 성격의 사람들은, 어떤 타인이 상황을 조작하기 위해 엄청나게 교활하고 또 간사한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아무리 그런 타인은 심리 조작이나 책임의 축소 및 은폐, 수동적 공격성을 통한 불만 표출, 타자 착취적인 관계 위치의 조정, 사회적 그루밍과 여론몰이 등에 능하다고(그리고 그의 ‘사악함’ 이면에는 사실 취약함이 놓여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럴 때 그 지인들은 “굳이 왜 그러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한다고?”, “내 코가 석자인데 그렇게 피곤하게 살 수가 있나?” 등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편 내가 만난 재기 넘치고 세련된 것을 선호하는 어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어떤 도덕적 강박이나 나르시시즘 없이도 우직함을 갖고 건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때 그들은 내게 “겉으로만 그렇지 결국 다 똑같이 이기적이야”, “사상이 꼰대여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같은 말을 던진다.

   또 일상적으로 시달릴 수 있는 부정적 정서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특히 우울과 불안의 혼합 방식은 내면의 정서 스펙트럼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개 외부에 보여주는(연출된) 것과 속마음을 철저히 구분하는데, 그들은 이 간극을 스스로 매우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대로 불안이 높은 사람은 사회적 상황에 맞게 연출된 부분과 실제 내면의 상태가 전혀 다르더라도 대개 이것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다. 즉,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때 겉과 속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밀착하게 되고 깊은 내면은 심연으로 밀려난다. 전자가 혼자 있을 때 텐션이 한없이 낮아지는 동안 후자는 오히려 텐션이 치솟을 수 있다. 이처럼 텅 빈 마음상태가 앓는 두 가지 정서는 사람마다 다른 구성으로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특히 마음을 재활하는 과정에서) 그 비율이 변화한다.

   만약 오늘날 여러 자전적 에세이나 자기계발서가 우리 삶에 미치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험적인 지혜가 담긴 그 가르침들은 대개 뚜렷한 구분 없이 저자의 이념적 욕망과 뒤섞여 선별되었거나 혹은 마음의 다양성과 재활의 여러 단계를 충분히 고려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다 보니 저자는 어떤 단일한 삶의 척도나 방향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고, 많은 독자들은 자신을 바보라고 느끼거나 혹은 저자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오해는 끊임없이 어떤 ‘전체’를 충족하고 싶어하는 개별 존재의 고유한 필연에서 나온다. 나는 앞서 그 필연성의 상대적인 시간을 독자들에게 상상된 희망(기획투사)이라는 이름으로 드문드문 소개한 바 있다. 그 잠재적 운명은 우리의 이념적인 자아 경향성, 현실을 살아가고 또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 심미적인 취미나 사랑하는 방법 따위에 중추적이고 또 일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 필자는 이처럼 전 생애에 걸쳐 불변하는 운명적 지향성이 적어도 네 갈래로 나뉜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나 그것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숙명에서 탈피하기를 원하는 개별 독자의 의지를 장려하는 과정 가운데 간접적인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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