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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Sep 11.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9>

3장. 심연 속으로

(5)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숭고의 빛


   마음이 깊은 밤 속에서 보내는 휴가는 덧없는 쓸쓸함일 수도, 고열을 앓는 악몽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일 수도 있다. 그 휘청이는 발걸음 끝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일까. 중요한 것은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고단한 일상을 꾸려가는 일은 대단히 현실적인 과업이다. 그리고 그처럼 지탱되는 현실이 계속되려면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동력원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란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내면은 쉼 없이 희망을 말하고 또 그 상상에 의지해왔다. 그러나 대개 그것은 기초공사가 부실한 마음의 이념이었다. 그것은 급조된 지푸라기처럼 약한 까닭에 더 짙어진 욕망의 그림자였으며, 죽음의 심연을 피해 가려는 몸짓에 의해 외려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어 버린 하나의 몰락이었다. 이제 허무의 늪에 떨어진 마음에는 의미 있는 내일이 남아있을까? 우리가 과연 이념이라는 목발 없이, 타인과 세상에 맞세워진 고집스런 기대심 없이 현실이라는 레일 위를 계속 달려 나갈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한 즉답은 피하고 싶다. 홀로 된 마음이 간직할 수 있는 절망의 모양과 무게는 사람마다 너무나도 다르거니와, 그 사적인 역사는 형언할 수 없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떤 상흔이나 우울감이 단번에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은 섣부른 확신일 것이다. 마음은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 어느 날 문득 씻은 듯 나았다고 느끼다가도 이내 달라진 것 없는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정서적 오르내림은 모든 이념적 의미화에 허망감을 느끼는 삶의 밑바닥, 그리고 그곳에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많은 사람들이 간직한 슬픔의 순환고리인 것 같다. 그 같은 비극은 마음이 괜찮은 것 같다가도 갑자기 일어날 수 있다. 혹은 괜찮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바삐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맑게 고양된 희망의 롤러코스터가 다시 수면 아래로 하강하기 전에.

   어둠 속에 웅크린 마음에 필요한 것은 더없이 빛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동행해 줄 또 하나의 어둠이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인데,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의 마음을 정처 없이 이끌어온 내일의 빛은 사실 처음부터 삶의 어둠을 끌어안는 빛만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나는 약 8년 전 어느 대학병원의 병실 침상에 누워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맹장이 파열되고 복막염이 위험한 수준까지 진행되어, 개복 수술을 한 뒤 중환자실에 두 달 가량 입원해 있었다. 패혈증 및 쇼크로 장 기능이 멈추고 의식도 얕았기 때문에 코로 위장에 직접 유동식을 주입하는 콧줄도 몇 주간 해야 했다. 아팠던 일이야 그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 시기는 여전히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로 기억된다. 당시 수술 부위의 극심한 통증, 물을 못 마시는 갈증, 목구멍을 꿰찬 두꺼운 튜브의 이물감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기 어려웠다.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타인들과 나눌 때 오히려 그것을 농담처럼 희화화하는 습관이 생기는 것 같다. 그때 밤의 시간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주 형편없이 다루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제 그만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24시간 무력한 고통에 허덕이는 송장 같다고 느꼈다. 웃으면서 이겨내려고 했지만 울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몇몇 고마운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독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옆 침상에 있던 암 환자는 종종 가족과 짧은 안부 통화를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당시에는 투병 ‘이후’라는 이념적 삶을 계속 고안한다는 일이 나에게 너무 덧없고 또 매정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왜냐하면 수술이 잘 끝난 나는 서서히 낫겠지만, 그의 생명은 이미 천천히 내리막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실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투병은 계속되고 있다. 저마다 어둠을 우회한 채 이념적인 빛만을 좇는 세상이 가려버린 그늘 아래,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 시련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으리라.

   삶의 무상함을 느끼던 그 시기에 나는 공허감과 함께 이상한 편안함을 느꼈다. 이전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듯, 하루라도 더 잘 살기 바쁜 문명사회의 《밝은 방》이 들여다볼 리 만무한 그런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이 더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각별히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내가 그때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가 자리를 얻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곳이 카톨릭 병원이었다는 점이다. 일요일 점심이 되면 병동에는 짧은 성모 성가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가 없는데도 그 시간만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가사가 없던 그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어쩌면 병동의 다른 환자들 역시, 오래 간직한 영혼의 상처가 씻은 듯 치유되고 또 고양되는 그 순간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잿더미처럼 밑둥만 남은 몸 속에 식어있던 영혼이 삽시간에 회생하는 경험이었다.

   나는 바로 이 시기에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나방의 죽음』을 처음 접했다. 대단히 짧은 이 에세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침 울프는 자기 방에서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춘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모든 생명이 기분 좋은 가능성과 활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때, 그녀는 실내에서 움직이는 작은 나방 한 마리를 본다. 그 나방은 낮과 밤이 섞인 것 같은 이상한 ‘잡종’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나비처럼 화사하지도 않았고, 또 다른 나방들처럼 무척 칙칙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창밖에서는 까마귀나 다른 새들이 창공 속에서 대단히 신난 듯 깍깍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반면 나방은 자신이 갇힌 유리창 한쪽 구석으로 힘차게 날아갔다가, 또다시 다른 구석으로 날아가는 ‘헛된’ 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날 아침에는 즐거움의 가능성들이 너무 크고 다양해 보였으므로 고작 한 마리 나방, 그것도 낮에 다니는 나방 몫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가혹한 운명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그 오죽잖은 기회를 최대한 즐기려는 그의 열의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 그를 지켜보노라니, 마치 세계가 지닌 거대한 에너지의 아주 가늘지만 순수한 한 가닥이 그 작고 연약한 몸속에 밀어 넣어진 듯했다.”

   하지만 나방은 지쳐 죽어가고 있었다. 실내에는 나방이 이미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싸워왔을 절대적인 시간, 곧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어떤 힘이, 특별히 그 무엇에도 괘념치 않는 무심하고 비개성적인 힘이 있었다. 그 숙명은 마음만 먹으면 온 도시를, 도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라도 잠기게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방은 실내의 문간에서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자신의 거대한 싸움과 항거를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천천히 죽음을 맞이한다. 울프의 에세이는 다음과 같은 숭고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토록 하찮은 적수에 맞선 그토록 큰 힘의 대수롭지 않은 승리는 나를 경이감으로 휩쌌다. 조금 전에는 삶이 기이했듯, 이제는 죽음이 기이해 보였다. 나방은 몸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아무 불평도 없이 우아하게 누워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요. 죽음이 나보다 강합니다.’”

   전부를 잃은 마음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그때가 오면 이 긴 겨울이 끝나고, 활짝 웃을 수 있는 봄이 비로소 텅 빈 마음을 찾아올까. 필자가 2부 전체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저마다의 고유한 삶에 맡겨진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혹시 아는가. 남은 생을 마저 살다 보면 해답을 찾게 될지. 또, 이미 남몰래 다 타버린 희망의 잿가루 속에서 젊고 눈부신 피닉스가 되살아날지.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의 여분을 가진 채 우리가 이 여정을 얼마나 더 지속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고통 안에서 진솔해진 경험이 우리의 영혼과 그 필연성을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숭고한 경험이란 결코 이념의 그림자 곁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너머의 비밀스러운 영혼의 소망 안에 잠들어 있다. 앞서 제시했던 ‘숭고한 행인’의 사례에서, 마을 사람들의 내면은 ‘바깥’의 시간 전체를 완수하려는 성급한 목적에서 그 희생양을 내면화했었다. 그처럼 칸트의 미학에서 숭고함이란 마음의 내부에만 머물기를 고집하는 자들이 꿈꾸는 이뤄질 수 없는 신앙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진실은 정반대다. 숭고의 심장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숙명과 화해한 마음이 ‘그럼에도’ 생명을, 즉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내부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뛰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 영혼의 진정한 위대성을 경험한다. 그때 마음은 나 자신이라는 보잘 것 없는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그럼으로써 누구나 염원해 온 삶의 희망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의 미래를 기획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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