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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Sep 05.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7>

3장. 심연 속으로

(3) 심연에 떨어진 화가들


   내가 만 나이로 5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한적한 놀이공원을 거닐고 있었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곳에는 한 바이킹 놀이기구가 있었다. 부모님은 내 키가 해당 어트랙션의 탑승 신장을 넘겼다는 것을 알고 타 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너무 타고 싶지 않아서 거부했지만, 이런저런 말과 분위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기구에 오르게 되었다. 안전장치가 내려간 순간부터 나는 약간 불안해졌고 탑승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생각이 엉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몇 분간의 운행이 끝났다. 그런 뒤 시간이 흘러서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종종 테마파크에 갈 일이 생기더라도 진자운동을 하는 놀이기구는 한 번도 탄 적이 없다. 중학생 때 친구들과 테마파크에 놀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는 웃으면서 계속 탑승을 사양했다. 아마 그 친구들은 희한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건 다 타 놓고 왜 저건 타지 않겠다는 건가. 우리가 꾸물거리자 직원이 물었다. ‘안 타실 건가요?’ 친구 한 명이 내 팔을 잡고 입구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팔을 강하게 뿌리치면서 순간적으로 노기를 띠었다. ‘안 탄다고!’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결국 친구들은 나를 포기하고 놀이기구에 입장해야 했다. 그리고 홀로 남아 친구들의 탑승이 끝나길 기다리던 그림자 같은 시간은 여전히 내게 기묘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이 소박한 과거사는 독자들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것이다. 비록 내 이야기가 베이컨이 공격적으로 표현한 신체적 ‘악다구니’, 그리고 자기속박의 고통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베이컨은 여느 화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려낸 세계의 연극적 분위기는 매우 폐쇄적이고 어둡다. 그 작품들은 절대적 시간으로 인해 고통받은 낮의 체제에는 거의 동물적인 수준의 민감한 공격성, 사납고도 발작적인 신체 수축이 잠재할 수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낮의 체제의 마음 균형을 잃지 않고자 으르렁거리는 신체, ‘전복되지 않으려고 다른 것을 전복시키는’ 외로운 신체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1989)》에는 잭 니콜슨이 배역을 맡은 조커와 그가 이끄는 범죄자 무리가 고담 시(市)의 미술관에 침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커라는 빌런과 그 부하들은 마치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이라도 되는 양 모든 예술작품을 훼손해버리는데, 거기에는 르누아르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커는 어떤 그림 앞에서 멈춰선 채 부하들에게 말한다. “이건 마음에 드는군. 내버려 둬.” 그 그림은 바로 베이컨의 작품 《고기와 남자의 형상》이었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역시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를 연출할 때 프랜시스 베이컨의 미학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베이컨이 그린 인물 형상들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밝은 방》의 실내에 놓여있기를 고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밀폐된 실내는 ‘바깥’의 어둠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안전한가? 화가의 실내는 이미 밤의 시간 한복판에 깊이 잠겨 있기에 불안하고, 불길하며, 또 그로 인해 예민하게 치미는 괴로움과 숙명적인 분노로 인해 자주 비명과 고함을 지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베이컨의 그림들에는 두 가지 패턴이 아주 선명하게 반복된다. 즉 보다 명랑한 색채를 띤 밝은 실내에서는 상상된 형상들의 외양이 비교적 안정되어 가는 반면, 칠흑 같은 어둠에 던져졌을 때는 곧바로 버티는 자의 신체적 절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고기와 남자의 형상》

   흔히 베이컨의 회화를 형상(Figure), 윤곽(contour), 아플라(aplat)의 세 요소로 나누어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형상은 얼굴이 뭉개진 인물이나 여러 동물적인 크리쳐 따위를 가리킨다. 윤곽은 형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아플라는 하나의 색깔로 고르게 칠한 색면을 뜻한다. 사실 이 세 요소는 모두 베이컨의 상대적인 시간, 혹은 《밝은 방》의 상상력이 절대적인 시간과 처절하게 불화(不和)하고 있는 현장성을 통일성 있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의 그림에서 형상들을 둘러싼 윤곽의 형식들은 밤의 시간이라는 강물에 띄워진 부표 내지 구명조끼의 역할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윤곽의 추상성으로부터 ‘심연에 잠식된 칸딘스키’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편 밝은 아플라가 칠해진 그림들은 베이컨 특유의 긍정적인 미학, 즉 절망적인 ‘바깥’에 맞서 내부적으로 덧대어진 명랑한 감성과 촉감각적인 감미로움을 암시한다. 사실 크리쳐들의 그로테스크한 외양은 위험해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아플라로 칠해진 실내에서 움직이는 한 화가의 마음은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말하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 연구》


프랜시스 베이컨,《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연구》(왼쪽) /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번》(오른쪽)


   베이컨은 자신의 마음이 반영된 작품을, 노르웨이의 또 다른 유명한 미술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와 비교하려는 시도에 대해 다음처럼 선을 긋기도 했다. “나는 뭉크보다는 좀 더 작품의 미적인 질(質)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의 2부 1장에서 짧게 소개되었던 아름다움(schönheit)과 숭고(Erhabenheit)라는 용어를 떠올린다면 그 메시지가 매우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마음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상상되고 또 경험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마음의 ‘바깥’에서 엄습하는 압도감에서 계기를 얻는 숭고라는 감정 중에서 베이컨은 일방적으로 전자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뭉크의 작품들은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바깥’에 대한 불안과 고독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뭉크는 자기가 사랑한 여성의 관능(진딧물)에 대한 질투, 불신과 배신감, 분노와 두려움 등에서 비롯된 내면의 상처나 절망적인 불안 같은 주제에 더 집중했다. 다시 말해 그는 숭고로부터 보다 직접적인 동기를 얻었던 셈이다. 베이컨과 달리 뭉크가 《태양》과 같은 밝은 그림을 말년에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에드바르 뭉크, 《불안》, 《마돈나》, 《태양》


   베이컨의 경우 ‘바깥’의 실제적 사태를 묘사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바깥’의 시간이 이미 오래전부터 베이컨의 마음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잠식해왔을 뿐, 그의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바깥’이 차단되고 또 유예된 내면의 방에서 꿈틀거리는 감미로운 형상과 충동적인 힘들이다. 이는 베이컨의 그림에 반영된 기하학적인 윤곽들이 밤의 시간을 낮의 체제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는 것만 도 알 수 있다(칸트는 이처럼 예술작품에 낮의 체제적인 '반성'을 수행하는 개념을 부여하는 능력을 지성Verstand이라고 불렀다). 베이컨의 성애적인 욕망 역시 ‘바깥’에 맹렬히 저항하는 정서 속에서 추구되고 있는 까닭에, 그것은 가령 에곤 실레의 도착적 성애와 비교할 때 확연히 높은 불안 수준을 보여준다. 베이컨의 파괴적인 욕망은 자신이 ‘실내’에서 겪는 고통을 십자가에 걸린 예수, 비명을 지르는 교황 등에 투사해 상상하기를 즐겼다. 예컨대 그가 주로 영감을 얻었던 ‘푸줏간에 걸린 고기’는 그에게 숙명적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살해당한 예수의 신체였던 셈이다. 물론 예수는 마음의 낮의 체제의 ‘바깥’에 있다가 린치를 당한 인물이므로, 베이컨의 이 같은 알레고리(해석)는 이념적 욕망의 소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두 형상》(왼쪽) /  에곤 실레, 《포옹》(오른쪽)


   프랜시스 베이컨이 마음의 심연을 대하는 방식은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와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베이컨이 극한 상황에 내몰린 《밝은 방》의 충동적 욕망을 끝까지 긍정하고 싶어 했다면, 말년의 고야는 그 같은 ‘인간성’의 이면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고야는 특히 프랑스 대혁명 당시 스페인 전역에서 자행된 프랑스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신경쇠약과 이명, 청력 상실 속에서 그려낸 82개의 《카프리초스》 판화들과 《검은 그림 연작》은 계몽과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들끓는 광기를 묘사한다. 특히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상당히 명료한 주제 의식 속에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사투르누스는 로마에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신으로,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즉, 어둠을 절개)한 존재다. 크로노스는 자신에게 ‘바깥’이었던 아버지를 이념적으로 거세하면서 저주의 신탁을 받는다. “너도 네 자식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신화는 공포를 느낀 크로노스가 자식이 생길 때마다 잡아먹는 방식으로 숙명을 회피하려 했음을 징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고야는 이처럼 이미 절대적인 시간에 사로잡힌 《밝은 방》의 광기, 그리하여 인간성 자체를 폭력적으로 잡아먹는 이념적 인간의 실체에 환멸감을 느꼈던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마법사의 안식일》, 《전쟁의 참상 제39번》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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