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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Sep 02.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6>

3장. 심연 속으로

(2)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밤의 시간(‘바깥’)이 갖는 절대성을 마음대로 무화(無化)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간이 자기 영혼의 고통스런 운명과 뿌리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마음의 심연으로 다가설수록 더 강렬해지는 정신 이상과 엑스터시(황홀경)에는 진정한 ‘빛’ 또는 구원이 놓여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빛’이라는 단어로 뭘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판단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밝은 방》이 ‘바깥(절대적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집착하는 시지각적인 형식의 날카로운 시야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진딧물에 대한 집착과 위반으로부터 개미가 느끼는 위안 내지 향락을 의미하는 엑스터시의 ‘빛’은 결국 공허감과 절망을 더 괴롭게 자극한다. 마음은 여전히 텅 비어있고, 그가 어둡다고 느끼는 익숙한 불행 역시 그대로이다. 따라서 다시 낮의 체제라는 해수면으로 복귀하는 마음은 이념적 욕망에 계속 목을 매게 될 것이다.

   한편 시오랑은 이와 달리 ‘나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빛’에는 어떤 영혼의 우아함과 경쾌함, 그리고 따뜻함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마음이 내는 ‘빛’은 일시적인 엑스터시 곁에서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어렴풋한 미래로 감지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미래는 늦은 저녁의 귀갓길에서 홀로 노랫말을 흥얼거릴 때, 불 꺼진 무대에서 홀로 추는 춤을 꿈꿀 때 희미하게 반짝인다. 언젠가 우리는 밤하늘에 뜬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 같은 것을 느껴보지 않았던가. 우리를 위해 조용히 반짝이고,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또 우리가 간직한 지상의 고통을 씻어주러 오는 어떤 미래를 말이다. 그 모든 명멸하는 미래는 아직 채 치유 받지 못한 우리의 영혼에서부터 꿈꾸어지는 것이다. 결국 시오랑이 말한 ‘빛’이란,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한 마음의 상대적인 미래를 가리킨다. 그것도 낮의 체제 특유의 사각지대를 무기한 방치하는 이념적인 미래상이나, 또는 저 ‘바깥’의 대상과 맺는 관계에 의존하는 타율적인 미래상 없이도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자율적인 영혼의 미래인 것이다. 이 같은 거듭남은 외부적인 삶에 관한 내면의 동기를 더욱 튼튼하게 함으로써 마음 안팎의 균형을 재건시킨다.

   하지만 비록 이 철학자가 마음의 미래를 비교적 잘 가늠해보았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가 희망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약간은 성급하게 단정 짓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사실 자족적인 희망을 계속 틔워내는 영혼의 능력은 식물처럼 천천히 생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매번 손쉽게 끓어오르고 또 앞질러 가고 싶어하는 이념적 자아의 욕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과정이다(그것이 3부의 중심 주제이다). 안으로 굽은 마음이 생장하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공들이는 법이나 진솔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고, ‘너무 늦었다’는 수치심이나 바닥난 인내심이 그 노력을 지레 훼방 놓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사랑에 관한 익숙한 습관 역시 조금씩 변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염세주의는 이 같은 마음의 회복과 성장을 가로막는다. 즉 익숙한 불행이라는 개미지옥으로 편안하게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게끔 우리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시오랑은 끝내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혐오감, 또 불행한 채 지상에 태어났다는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절대적인 시간이 야기할 수 있는 불행에서 너무 빨리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시오랑과 카라바조가 처했던 어둠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네 명의 ‘바로크적’ 예술가를 빠르게 살펴보기로 하자. 질 들뢰즈 같은 실존주의자가 20세기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 데는 분명한 동기가 있다. 베이컨의 작품에 나타난 불안한 신체 형상들은 카라바조의 삶이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완과는 거리가 멀다. 베이컨의 그림은 마음에 관한 들뢰즈의 이념을 ‘증언’해준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낮의 체제가 저 밤의 심연에 대해 고집하는 불화(不和)와 이념적 충동이야말로 곧 우리 마음의 ‘밑바닥’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 『감각의 논리』 등 다수의 저작에서 그 같은 확신을 전개했다. 아마 몇몇 독자들은 앞서 철학자 하이데거가 ‘초월 논리학(답정너 이념)’이라고 부른 것을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라고 바꿔 불렀다는 1부의 언급을 기억할 것이다. 때 들뢰즈의 생각을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이념적 충동이 가진 어리석음을 설령 병리적인 관점에서는 히스테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더라도, ‘존재의 심층’에서 본다면 그 같은 전복적인 움직임이야말로 모든 익명적인 운동과 변화의 최소 단위(필연)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줄 예술가를 찾았다. 그리고 베이컨이 그려낸 형상은 매우 적절한 사례였다. 사실 카라바조의 연극적인 그로테스크에도 여러 장점이 있긴 하지만, (외관만이 아닌) 마음 내부에서 직접 발생하는 운동에 관한 들뢰즈의 믿음을 증언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연구》
프랜시스 베이컨,  《두상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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