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취약한 상태에 있는 마음이 밑도 끝도 없이 밤의 심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상적인 삶이 이따금 상상하는 자기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죽음,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둡게 상상된 마음의 심연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마치 물과 기름처럼 대치한 채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 마음의 《밝은 방》은 심연과 직접 맞닥뜨리기를 거부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충동적인 죽음 가까이 내몰릴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활동한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이 같은 마음의 상황을 잘 요약하고 있다. “절대 무(無)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리며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 미친 상태의 반쪽짜리 존재가 주는 불안은, 죽음이라는 우리 존재의 완전한 없음에 대한 유기적 공포감보다 훨씬 복잡하다. ··· ··· 맑은 정신이 드는 데 대한 공포, 자신으로 돌아가는 순간들에 대한 공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부딪힐 재난에 대한 직관적 예감은 정신 이상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므로 정신 이상을 통한 구원이란 없다. 혼돈은 받아들이겠지만 빛이 두려운 것이다. ··· ···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로르샤흐 테스트에서 마치 위축된 마음의 리트머스 종이처럼 활용되었던 바로 그 검은 어둠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모든 상상의 뿌리에는 깊은 절망이 놓여있다. 상흔을 가진 마음은 그가 돛단배처럼 저 멀리 띄워 보낸 어떤 시간, 따뜻한 사랑과 희망에 관한 그토록 근본적인 단념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간직된 그 슬픔과 두려움은 거울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을 일생동안 어눌하고 또 경직된 무엇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저 ‘바깥’이 온통 그로테스크한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이유 역시 영혼이 겪은 불화(不和)에 있는 듯하다. 비밀스런 우리 영혼의 희망은, 정확히 그 같은 불화와 단념이라는 방식을 통해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어떤 정상적인 균형이나 평온하게 인내하는 삶만 갖고서는 도무지 내가 나일 수 없다는 감각, 또 그에 따른 충동적 일상의 불균형이 가져온 친숙한 불행으로 인해 서서히 시들어간다는 감각보다 삶을 더 괴롭히는 것이 있을까? 저 어둠이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앗아갔는데도 사람들은 좀체 그것을 되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로테스크한 예술이라는 이상한 나라의 토끼를 따라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일상적 자아상에 대한 신뢰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때 포기되는 것은 가령 자아의 일관성, 고전적인 조화와 균형, 모순 없는 인격, 이중성 없는 밝음, 거짓 없는 진술 등에 관한 믿음일 것이다. 마음의 어두운 심연에 반쯤 잠긴 화가들의 《밝은 방》, 곧 그들의 명징한 의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의 삶에 잠재되어 있던 그런 광기를 감추지 않는다. 가령 그것은 피를 보려는 잔혹한 욕망,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우울과 불안에 찬 실존적 몸짓, 인간성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 조절할 수 없이 들끓는 신체화된 충동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시각에서 ‘검은 바탕’으로 표현된 심연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사태, 즉 내면(상대적 시간)의 《밝은 방》이 절대적 시간과 맺는 열정적인 관계가 드러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1571년에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카라바조(Caravaggio)는 바로크적인 회화 양식의 선도자로 일컬어진다. 그가 작업한 종교화들은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는 양 미화되는 현실의 뒤안길에 출몰하는 섬뜩한 조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크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카라바조 이전의 르네상스 또는 고전주의 미술이 가졌던 초월적인 이상, 희망에 찬 표현들을 세속화하는 맥락을 포함한다. 들뢰즈 같은 실존주의자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특히 카라바조와 같은 바로크 미술가에 주목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심연 혹은 '어두운 전조' 속에서 파편화되고 또 잔혹하게 일그러지는 우리 마음의 ‘본질적’ 이중성을 포착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tenebrism) 화법이 구사한 날카로운 명암은 이상적인 빛 아래 그림자에서 도사리는 현실을 도발적으로 암시하고 싶어한다. 그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예민하게 적용했던 명암법은 이후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 미술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인물 묘사가 ‘사실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상자의 내면을 건드리는 그 같은 사실성의 진정한 가치는 물론 어떤 대상을 UHD 화질로 옮기는 것과 같은 충실한 시각적 묘사 자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진솔한 가치는 카라바조 자신이 어둠 곁에서 느낀 수축적 불안과 세속적인 살해 욕망을 자기 내면의 필연성으로 감지하고, 또 그 같은 마음의 잠재적 실상을 저 ‘성스러운’ 종교화에 대범하게 투사했다는 점에서 온다. 예술가로서 카라바조의 일생은 마치 성경에서 최초의 살해자이자 방랑자로 기록된 카인의 번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마주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실제로 분을 잘 참지 못했던 카라바조의 삶은 평온함이나 따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도시 뒷골목에서 자주 싸움을 벌였고, 품속에는 늘 날붙이를 가지고 다녔으며, 결국 살인과 도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젊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내면(상대적인 시간)과 그 욕망은 ‘바깥(절대적인 시간)’에 대해 반골 기질이 있는 동시에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듯하다.
카라바조의 여러 ‘신학적’ 작품에는 그 자신의 비밀스런 취향과 연극적인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데, 보다 눈에 띄는 것은 참수를 주제로 한 장면들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메두사의 머리》, 《세례 요한의 목을 벰》, 《성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등 많은 작품들이 그 주제에 천착했으며, 골리앗의 머리를 참수하는 다윗은 카라바조의 자화상을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상상적으로 참수당한 골리앗이 카라바조의 낮의 체제적 의식에 스트레스를 주는 절대적 시간을 암시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위반적인 형태로 죽음에 관여하는 황홀경(ecstacy)을 향한 집요한 욕망은 카라바조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의 작품 《나르키소스》는 어두운 마음의 거울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들뢰즈의 경우, 심연 속에서 충동적인 엑스터시와 폭력의 미학을 추구하는 이 같은 생명력을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메두사의 머리》, 《성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나르키소스》
흥미로운 대목은 카라바조의 욕망이 자신의 주제의식에 여성들을 동조시키는 방식이다. 앞선 그림에 나오는 유디트와 살로메는 그 같은 살해의 주요 목격자이자 동조자이며,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잘린 메두사의 머리는 거의 남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또 《황홀경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는 지상에 속한 예수의 여제자가 홀로 하이라이트를 받는 장면을 다분히 관능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 사실 마음의 《밝은 방》이 밤의 시간에 대해 갖는 팽팽한 긴장감을 암시하는 엑스터시(여기서는 살해와 에로티시즘적 환상)는 그 자체로는 이 책의 중심 주제를 빗겨간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의 경우, 그 욕망은 밤의 시간과 화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할 수 있는 하강의 테마와 모호하게 뒤섞여있다. 즉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의 위험성을 줄여주고 또 불행을 완곡하게 위로할 수 있는 모성성 내지 ‘여성적 신체’라는 일관된 테마이다.
《황홀경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
카라바조의 1602년작 《성 마태오와 천사》에는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그림에서 천사는 성자 마태오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천사의 표정이나 태도는 너무 자연스럽고 또 적극적이라서 둘은 거의 연인 사이처럼 보인다. 게다가 천사의 날개는 백조 같은 외양으로 성적인 매력을 배가하고 있다. 반면 뻣뻣한 자세를 한 늙은 마태오는 약간 불안하면서도 아이 같은 표정으로 남몰래 위안을 받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카라바조는 자신의 인간적인 마음을 투영했을 이 그림을 꽤 아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이 그림에서 마태와 천사의 표현이 매우 불경하다는 이유로 작품의 인수를 거부했고, 상처를 받은 카라바조는 결국 비교적 고전적인 천사의 외양을 그려 넣은 《성 마태오의 영감》을 재제출해야 했다. 강렬한 빛을 사용한 수정작을 보면 화면에는 다시 불안하고 연극적인, 즉 ‘바깥’에 대해 공격적인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말이지 그는 첫 번째 작품 속에서 훨씬 편안해 보인다.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마태오의 영감》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이처럼 마음의 《밝은 방》이 앓는 번뇌와 피폐한 희망과 관련해 다음처럼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빛나는 엑스터시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것을 느끼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는 항상 우울해지니까. 그 대신 환한 빛이 나 자신으로부터 솟아나와 세상을 변하게 만드는, 엑스터시의 긴장과는 거리가 멀지만 빛나는 영원의 평온함이 유지되는 그런 상태를 원한다. 거기에는 경쾌한 우아함과 미소의 따스함이 있을 것이다. ··· ··· 더 이상 장애물도, 물질이나 형태나 경계선도 없는 그 천국 속에서 나는 빛으로 죽고 싶다.” 차갑게 식은 철학자의 시간은 그의 따뜻한 심장을 앗아간 절대적인 시간과 싸우고 있다. 그의 어린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두운 시간과 화해하지 않은 채 텅 빈 결핍의 고통스런 숙명을 끊어내는 방법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