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3>
2장. 땅거미 질 무렵
(3) 번뇌(煩惱): ‘바깥’으로 이어진 붉은 실
지금껏 우리는 안으로 굽는 마음의 《밝은 방》, 혹은 수축된 낮의 체제의 이념이 저 ‘바깥(절대적 시간)’을 염려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살면서 반복적으로 앓는 신경쇠약을 중생(衆生)의 번뇌(煩惱, kleś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번뇌를 멸(滅)한다’는 그 아이디어의 유래는 기원전 인도의 철학 모음집 『우파니샤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같은 유래는 괴로운 삶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밝은 방》의 마음 습관이 긴 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즉 이미 우리 안에 스며든 절대적 시간을 비워내거나 몰아내고, 또 그 내면의 어둠을 어떤 ‘바깥’의 대상에 투사한 뒤 절개하려는 비판적 본성이 극도로 혼잡한 지성사를 펼쳐왔으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나 『우파니샤드』가 추구하는 통합된 자아가 고대 그리스의 사유 전통보다도 낮의 체제의 본질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감정적인 번뇌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절대적 시간의 어둠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주체에 가해진 폭력에 대한 니체의 감수성과 그의 이념적 욕망 사이에 나타난 자가당착(自家撞着)이 그를 엄청난 신경쇠약으로 몰아갔듯이 말이다.
20세기 초, 정신과 의사 헤르만 로르샤흐는 피험자에게 잉크의 얼룩을 보여주었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반응을 기록하는 한 심리 진단서(로르샤흐 테스트)를 고안했다. 그 테스트가 밝힌 것은 검은색이라는 애매한 충격이 마음의 번뇌, 이를테면 회한과 죄의식, 착잡한 욕망이나 잔혹한 성애적 신체, 정서적 불길함이나 즉각적인 공포 등을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은 거기서 자신의 두려움을 역동적으로 상상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검은 얼룩의 창백하고 악마적인 이미지가 주는 퇴폐적 관능에 매료된다. 사실 공포적인 혐오, 금기적인 에로티시즘은 그것들이 마음의 평형이나 주도권을 흔들어 놓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서로 같은 것이다.
이제 필자는 마음의 번뇌를 자극하는 절대적 시간(‘바깥’)의 현신(現身)처럼 느껴지는 어떤 대상을 잠시동안 ‘진딧물’이라고 부를 것이다. 한편 그 진딧물을 에워싼 채 어떤 희망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현실화 방법으로 편집 · 통제하려는 존재에게 ‘개미’라는 이름을 붙여보도록 하자. 독자들은 이때 진딧물과 개미라는 묶음이 두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밝은 방》에 속한 마음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믿는 ‘나(자아)’는 이러한 묶음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내가 부싯돌로 불 피우는 것을 보고 부모나 이성(진딧물)이 감동하여 나를 칭찬한다면, 우리는 ‘나(개미)’라는 것의 정체성을 불 지피는 일의 영예로움에서 찾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진딧물이 발생시키는 ‘중력장’ 근저에서는 늘 이상한 긴장감이 감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 같은 현상에 아우라(aura)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가령 개미의 방어적인 마음은 진딧물을 마주하여 긴장감과 현기증을 느낄 때 지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또 ‘씹을 대상(희생양)’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깥에 책임이나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경우가 있다. 한편 진딧물이 주는 긴장을 감내하면서 소유욕을 실현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때 마음은 그 같은 ‘바깥’의 대상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찬미하다가도 망가뜨리고 싶어 하며, 종속을 거부하면서도 그 관계에서의 통제감을 확인하고자 편집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텅 빈 마음에 관한 이 같은 설명이 매우 기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작동은 매우 보편적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매혹적인 연인이나 우상에 다가서려는 우리의 욕망, 세상을 해석하려는 학자의 욕망,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욕망, 내담자에 대한 상담가의 욕망, 훈육대상에 대한 교육자의 욕망, 심지어 상실의 고통에 대한 생존자의 욕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불안하고 메마른 마음은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자기 방식으로 통제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할 게 없음을 확인하려고 공포영화를 찾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죽음을 상상하기도 한다. 또는 긴장을 주는 대상에 관한 농담을 즐기거나, 사랑하는 대상의 약점이나 흠결을 잡아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을 위축시키는 ‘진딧물-바깥-절대적 시간’의 자율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계속 갖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뒤랑은 자신의 책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서 다음처럼 말한 적이 있다. “줄은 시간에 대한 《집착》, 즉 시간의 의식과 죽음의 저주에 연결되어 있는 인간 조건의 직접적 이미지이다.” 이와 관련해서 동아시아 지역에는 운명의 붉은 실이 인연을 이어준다고 하는 오랜 전설이 있다. 필자가 볼 때 그 전설은 자신이 집착하는 진딧물에 대해 번뇌를 느끼는 개미가 맺는 관계성을 나타내준다. 어떤 운명적인 대상과의 유일무이한 관계에서 파괴되지 않는 필연성은 사실 대상이 아니라 붉은 실 자체에 놓여있다. 현실에서는 실이 한 지점에서 끊어질 수 있어도, 여전히 해갈되지 않은 마음으로 인해 즉각 다른 대상을 찾아 다시 실을 잇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실 자체의 필연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독자들과 함께 ‘우리 마음의 매듭을 풀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스스로 가둔 그 마음의 매듭이란 우리가 상상된 희망을 위해 내사(introject)해온 것, 즉 ‘나’를 구성하는 현실화 방법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이 애를 쓰며 내면화한 매듭들 그 자체가 상처받은 우리 영혼의 심장인 것은 아니다. 그 밧줄들은 언뜻 나 자체를 구성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런저런 진딧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잔뼈가 굵어진 그런 안으로 굽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 같은 실존주의자는 마음의 ‘바깥’을 실재 또는 큰사물(the Thing)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우회’하는 마음의 윤리적인 매듭(현실화 방법)에 아주 직접적인 실체성을 부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타란툴라의 마음을 실제로 지탱하는 생명줄, 이념적 권력이라는 모든 거미줄들이 비밀리에 통과하는 하나의 팽팽한 밧줄은 바로 ‘바깥’의 먼 어둠 속으로 닻처럼 이어진 붉은 실이다. 우리가 종종 작은 외부 자극에도 크게 놀란다거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이 실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딧물의 ‘중력장’ 가까이서 겪는 번뇌가 고통과 현기증을 일으킬 때는 그 같은 상상된 어둠(‘바깥’)에 대한 감수성이나 공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며, 그때 몸과 마음의 수축 및 바깥과의 분리 · 지배충동은 거의 불감증적인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질베르 뒤랑은 이 같은 낮의 체제의 작동이 진딧물에 잠재적으로 행할 수 있는 여러 문화적 ‘실천’들을 제시하는데, 그중 현재도 진행중에 있는 최악의 악습은 여성 할례(FGM, 여성성기절제)이다. 여성 할례는 아프리카 전역과 동남아권의 몇몇 무슬림 공동체에서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그때 주로 두렵고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여성의 성적 ‘방종’, 즉 개미의 편집증적인 희망을 뿌리치거나 무시하는 자율적 욕망이다.
사실 몇몇 독자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엄청난 숫자의 계몽주의자들이 여성 혐오자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그리고 세계 3대 종교(기독교·불교·이슬람교)가 남긴 서사들이 이미 깊이 오염되었을 뿐 아니라 루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이 지독한 여성증오적 발언들을 남겼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성과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는 점 또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 기초해서 마음의 낮의 체제는 ‘남성적’, 혹은 가부장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개미(낮의 체제)의 경계심이 공포적인 혐오를 갖고 또 ‘거세 충동’을 느끼는 대상은 그에게 번뇌를 일으키는 절대적 시간(‘바깥’) 그 자체이지, 문화구조적으로 합의된 어떤 특수한 진딧물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앞서 언급된 모든 사례들은 단지 남성의 번뇌를 자극하기 쉬운 여성의 신체 및 존재 자율성을 불쾌한 ‘바깥’으로 투사했던 것이다.
마음의 낮의 체제, 그리고 그것이 개인 · 부족 수준에서 ‘바깥’에 대해 내비칠 수 있는 의심 및 혐오적 절개 성향은 실제로 젠더(gender)를 전혀 가리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은 예컨대 동시대의 수많은 젠더 및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푸코나 라캉, 니체, 들뢰즈 등 실존적 계몽주의자들을 옹호하고 또 내면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수전 손택은 그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자신의 집필 동기가 과거 암 투병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의 요점은 결핵이나 에이즈 등 질병의 이미지에서 신화적인(진딧물적인) 환상을 보는 개미들의 편견이 환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안색을 창백하게 만드는 감염병인 결핵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낭만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는데, 손택은 그 폐병이 가진 우울증적인 이미지가 마치 ‘남다른 예술가’의 상징처럼 소비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지점에서 손택의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마음의 《밝은 방》에서 바라볼 때 번뇌를 만드는 그런 진딧물 근저에서는 늘 이상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처럼 투사적이고 또 나르시시즘적으로 믿어진 이미지는 타인이나 현실 배후에 놓인 마음의 실체로부터 개미, 그리고 붉은 실이라는 요소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통상적인 ‘비판적 지성’들이 그러하듯 마음의 문제에서 자폐적인 사각지대를 가진 것은 손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손택의 《밝은 방》 내부에서 ‘타인’이란 오직 저 ‘바깥’과는 무관한 시야에 들어오는 그런 사람 내지 현실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의 저술이 가진 시선은 절대적인 시간의 밤을 향해 깊이 하강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투사적이고 이원론적인 불신으로 가득 차 있어 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계몽주의자들의 번뇌는 우리 마음의 여정을 깊은 어둠으로 안내할 수 있는 예술의 본성에 대해, 한갓 퇴폐적인 탐미주의(眈美主義) 또는 물신숭배적인 문화 코드로 믿어버리는 환상에 있어서 실로 만장일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전위적인 '비판주의'를 띠지 않는 예술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많은 비평가들의 태도는 똑같은 현상이 반대로 뒤집힌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깊어가는 번뇌는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이 영혼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수도사처럼 내면에만 갇혀있지 않고, 가장 낯선 사람들과의 사교적인 삶과 편견 없는 협력의 기쁨을 학습하는 일도 바로 번뇌를 견디는 과정에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응시(適應視)에 이를 때까지 붉은 실을 따라 더 내려가 볼 것이다. 거기서 너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던 ‘바깥’의 명암은 점차 완곡한 외양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