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팎이라는 근본 주제를 독자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미학(美學)이라는 학문에서 중시되는 ‘아름다움(Schönheit)’과 ‘숭고(Erhabenheit)’라는 용어를 소개하는 일은 약간의 도움을 줄 것 같다. 우선 아름다움은 마음의 ‘내부’, 그리고 숭고는 ‘바깥’에 각각 대응해 발생하는 경험 내지 감정의 형식이라는 점부터 알아두자. 철학자들이 중요한 마음 현상 및 여러 심리적 계기들로부터 그 단어들을 발명한 것은 실로 의미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두 단어의 의미에 관한 ‘비판적’ 철학자들의 정의는 이미 그들의 계몽주의적 성향이 강제하는 ‘답정너 이념’에 의해 불온전하게 설계 및 판단되고 있으므로, 이 책의 주제를 따라오려는 독자들이 미학사의 기존 설정값에 크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선 철학자 칸트를 기준으로 볼 때, 아름다움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마음에 의해 자발적으로 상상된 희망, 즉 자기목적적인 그런 감성적 투사(projection)로 인해 살아있음과 활력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독자가 어둡지만 안전한 그런 실내에 앉아있다고 하자. 키가 큰 창문을 열자 따뜻한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실바람을 타고 산들거리는 흰 커튼, 빛의 광채와 그것이 방 안에 드리운 그림자의 음영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독자는 손을 창밖으로 뻗어 부드러운 바람과 햇빛을 느낀다. 실내에서 고양이가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독자는 집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저 혼란스러운 세상과 만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지만 지금 우리는 충만함 속에 있다. 그리고 단지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독자는 이런 아름다움이 깨어지지 않고 보호받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한다. 만약 환난 속 세상이 그렇게 두지 않는다면, 독자는 기꺼이 ‘선한 의지’로 세상과 싸울 것이다. 칸트는 마음이 이런 방식으로 순수한 동기를 얻는 내적 현상을 아름다움이라고 불렀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Summer Breeze>
반면 숭고의 감정이 일어나는 계기는 마음의 ‘안’이 ‘바깥’에 의해 압도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여기서부터는 칸트의 신앙과 무관하게 쓰겠다). 위에서 예시로 쓰던 상황을 이어가 보자. 창문 밖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간다. 집 문을 걸어 잠근 당신은 마음이 불쾌해지는데, 왜냐하면 집에서 나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집밖에서 무정한 전쟁이 일생동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가 잔인한 군인이라고 확신하고 그에게 돌멩이를 힘껏 던진다. 그러자 동네의 다른 집 주민들도 욕설을 하면서 모두 행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무수한 돌에 맞아 죽었는데, 사실 당신은 그가 밉기는 해도 그런 결과까지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던 차였다. 당신은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가 행인의 시체를 확인한다. 아직 따뜻한 그의 품속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즉, 행인은 언제까지고 고립되어 있을 이 작은 마을의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수백 마일을 여행한 것이다. 당신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사실을 이웃들에게 알리지만, 그들은 우리의 말이 거짓이라면서 오히려 당신을 몰아세운다. 행인의 ‘숭고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당신과 몇몇 소수의 이웃 뿐이었다. 이후 행인을 추앙하고 기리는 사람들과 공간이 생겨나기도 했다.
독자들은 숭고에 관한 우리 마음의 경험 자체에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안으로 굽는 마음을 둘러싼 두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하나는 저 ‘바깥’의 숭고한 인물에 대한 주민들의 자기동일시는 손쉽게 마음의 또 다른 ‘내부’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젠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가지고 집대성한 마을의 교리를 불신하는 사람은 또다시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는, 저 ‘바깥’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던 그 행인이 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단지 좀 더 용감하거나 희생정신이 있을 뿐인)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바깥'에 있던 대상은 더 이상 '바깥'으로 남아있지 않고 '바깥'에 대한 '내부'의 이념을 강화해주고 또 그것의 정신적 승리를 완성해주는 어떤 것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고 해서 숭고한 감정의 신비로운 원천이 아름다움, 즉 내부적인 마음의 시간에 ‘소유’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시간은 상대적이고 숭고의 시간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은 사실 ‘바깥’의 절대성에 뿌리내린 것인 한편, 우리가 숭고함을 일종의 절대성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또한 우리 마음의 상대성(유한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만큼 다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과거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시기에 그렸던 《검은 회화(Las pinturas Negras)》를 보자. 거기서 우리는 화가가 삶의 고통과 잔혹성의 깊이를 항상 검은색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저 ‘바깥’의 절대적인 시간은 언제든 우리 내면의 환희를 앗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명랑한 색을 칠할 수 있더라도, 고통을 견디는 화가가 선호하는 색상은 더 깊고 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처럼 검은색이 짙어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명랑한 색을 쓰는 화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란시스코 고야, <Two old men eating soup>
'바깥'이라는 시간의 절대성(숭고)은 결코 우리 내면의 상대성(아름다움)에 의해 이리저리 뒤집히지 않는다. 그것은 저마다 안으로 굽은 우리의 상대적인 마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방 안에서 우리의 시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실은 고통을 겪은 우리가 처음부터 스스로 방 안에 갇혀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마음을 잃어버린 우리가 '텅 빈 마음'을 앓게 되는 이유, 그리고 불행한 내면의 시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이 이미 살아온 시간의 절대성 때문이다. 그리고 행인의 삶이 마치 신과 같은 숭고성 내지 '보편성'을 부여받는 까닭은 우리가 똑같이 겪었던 시간의 고통을 이겨내는 저 행인의 모습에 우리 마음이 감화되고 또 공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마치 '바깥'을 가졌거나 혹은 극복했다고 오해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치유하는 여정길에 오른 독자들은 결코 저 '숭고한 행인'이라는 감동적인 이념에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과제는 어디까지나 저 행인이 놓여있던 바탕, 즉 텅 비지 않은 '바깥'과의 근본 불화를 내면에서부터 해소하고 또 치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행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독자들은 잘 몰랐겠지만 사실 ‘숭고한 행인’은 잔인한 군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이 사태와는 전적으로 무관한 인근 마을의 민간인이었다. 군인들은 먼저 행인이 살던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행인의 외투 속에 ‘전쟁이 끝났다’고 적힌 종이를 집어넣은 뒤, 행인이 다른 이웃 마을로 혼자 걸어 들어가 그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총구로 위협했다. 군인들은 꼭꼭 숨은 마을 주민들이 안심해 거리로 나오면 그때 그들의 잔인성을 드러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인은 경계심을 가진 주민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버렸고, 단 한 사람만 거리로 나와 행인의 사체를 확인할 뿐 아무도 거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시해진 군인들은 떠나버렸다. 그리고 주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행인의 ‘숭고함’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인은 그들의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주민들은 행인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얼굴을 가졌었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는 원망과 고통, 증오심에 찬 광기 어린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독자들은 약간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안으로 굽은 우리 마음의 죄책감을 공포스럽게 자극하는 이 각색은 사실 단편 작가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필자가 가볍게 오마주한 것이다. 문명사회가 뉴스 기사나 교양서들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또 이런저런 영웅의 모험담이 보고하는 ‘투명한 진실’은 어떤 얼굴을 한 진실일까? 사실 칸트의 저작인 『판단력비판』에는 일반적으로 깊이 파헤쳐지지 않는 몇몇 미스터리한 언급이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술의 본질을 말할 때 숭고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의 암시들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같은 주장이 나와야만 했던 까닭에 대해 이미 독자들에게 작은 단서를 제공했다. 즉 계몽주의자에게는 마음의 ‘내부’와 ‘바깥’이 처음부터 하나의 진실이라는 점 말이다. 다시 말해 몇몇 주민들에게 행인의 존재가 ‘숭고함’으로 승격되었듯, 그때 ‘바깥’이란 단지 우리 내부의 본모습을 일깨우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술이 실은 우리 시야의 맹점과도 같은 저 ‘바깥’의 강력한 영향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라면, 계몽주의자는 이상한 나라에서 온 그 토끼를 결코 너무 멀리까지 쫓아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술과 함께 토끼 구멍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단편 《아스테리온의 집》에는 행인의 이야기와 비슷한 재미있는 픽션이 실려있다. 그 이야기는 크레타 섬의 유명한 그리스 신화인 ‘영웅 테세우스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소재로 한다. 미노타우로스는 한 나라의 왕비와 흰 황소 사이의 미스터리한 수간(獸姦)을 통해 태어났는데, 그 사실 자체가 끔찍한 치부였던 미노스 왕은 이 난폭한 괴수를 ‘탈출 불가능한’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에 가두었다. 아테네의 지혜로운 영웅 테세우스는 그와 사랑에 빠진 여인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미궁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미궁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수는 그때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우리가 아는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는 그때 끝난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미노타우로스의 독백은 자신에 대해 설화가 기록한 내용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노타우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미궁은 자물쇠조차 걸지 않아 열려있는 자기 집일 뿐이고, 자신의 성격은 실제로 잔인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며, 게다가 그는 자폐적으로 미궁에만 갇혀 사는 게 아니라 종종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입을 빌린 미노타우로스는 오히려, 자신을 보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손바닥처럼 평평한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워서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한다.
2019년 개봉했던 한국 영화 『사바하』 역시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작중에서 강원도 영월에는 한 아이가 ‘털이 무성한 괴물’로 태어나는데, ‘숭고한’ 믿음을 가진 가족과 주민들은 공포스러운 ‘그것’을 16년간 감금한다. 그러나 영화는 말 그대로 악몽과 같았던 ‘그것’이 실은 결백한 여자 아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박 목사(배우 이정재)는 영화 내내 신의 존재를 뒤쫓지만 끝내 그것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내뱉는 쓰라린 독백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깨어나소서. 저희의 울음과 탄식을 들어 주소서. 일어나소서. 당신의 인자함으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시고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떤 독자들은 이 같은 대사에서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당대에 가장 ‘신학적’이었던 율법주의자들, 즉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는 '바깥'의 어떤 대상을 서사 권력을 통해 겹겹이 에워싸면서 그것을 숭고화하는 내부자들의 아이디어는 처음부터 '바깥'의 어떤 실체를 통제하고 유폐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