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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Aug 10.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9>

1장. 폐허 위에 짓는 마음

(2) 불행의 전도서, 실존주의


   흔히 사람들은 실존주의가 신화적인 맹신의 해체, 개인적 욕망의 해방,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배회하는 타자들을 지지하는 사상이라는 인상 정도를 갖고 있다. 내게 그 인상은 절반만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달의 앞면만 보고 내려진 평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가 실존적인 삶과 철학적 실존주의를 혼동하지 않기를 권장한다. 전자는 누군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인 반면, 후자는 그 삶의 고통을 보편화하려는 이념이다. 모든 실존주의자는 실존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실존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 모두가 극렬한 실존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실존주의는 어떤 소수의 특정 철학자에게만 한정되어 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적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몇몇 이념적인 현대인들, 그리고 거의 모든 현대적 철학자가 잠재적으로 나누어 가진 태도 쯤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실존주의는 철학과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이미 우리 사회 저변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실존주의가 가진 최대 장점은, 그것이 타인과 세상에 빼앗긴 우리의 마음을 찾는 여정을 돕는 최초의 조력자라는 것이다. 실존주의적인 생각을 통해 처음 자유를 맛본 마음은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간 체질에 맞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던 그런 세상의 기준과 허영 어린 욕망들을 벗어버린다.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존적 삶은 신화적인 환상에 젖어있는 세상과의 ‘이유 있는 불화(不和)’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책 제목은 그 불화가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 방식을 암시해준다. 이를테면 역하고 고통스러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는 저 ‘바깥’의 소음과 침입을 모조리 게워내는 것이다. 거품과 같은 삶의 환상들을 적당히 걷어내고 나면, 텅 빈 마음은 뚜렷한 목적 없이 세계를 이리저리 배회하는 시기를 맞는다. 이윽고 점차 분화하던 마음의 《밝은 방》은 ‘나’와 ‘바깥’이라는 근본 구도에 도달한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한 단순 염증을 넘어 지속적인 혐오감에 시달리게 된다.

   실존적 삶의 양태나 ‘실존화’된 수준은 그가 소유한 권력이나 개인 성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념으로서 실존주의의 근본 성격은 하나로 압축해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큰 기대심 자체를 마음 깊이 철회하고, 또 개인이나 부족 수준의 내부 이념에 속하지 않는 ‘바깥’을 불신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다.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전형적 실존주의자들은 취미생활 및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자신의 충동적 욕망을 자유롭게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욕망은 자기균형을 유지 및 지탱하는 삶을 최우선시하는 까닭에, 안팎으로 상당히 금욕적인 검열 기제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하는 불교의 윤회사상과 실존철학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고, 때로는 차가운 피를 가진 그 삶의 양식에 ‘욕망의 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질 들뢰즈는 무거운 삶의 의미들을 벗어버린 이 같은 의미의 ‘밑바닥’, 즉 실존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말에 꽤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장 황량한 실존적 상황에 놓인 삶이 정신적인 자립을 획득하는 것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는 텅 빈 마음을 욕망과 이념으로 지탱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에 처한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은 건강한 사회적 유대감이나 화해를 스스로 금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행복에 대해 냉소하는 마음의 습관이 스스로 치유의 가능성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실존적 삶의 특정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인간으로서, 일단 실존주의자들이라고 꼭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환멸감에 의한 실존적 상황이란 결국 자유, 그리고 마음의 균형을 위해 ‘점점 더 미리 앞당겨지는 불행’ 같은 것이다. 대인관계에서의 적응 대신 존엄을 선택한 실존적 삶은 ‘익숙한 불행’을 벗 삼아 살지만, 그래도 여전히 치유와 행복의 얼떨떨함을 희망할 수 있다. 반면 실존주의자로 돌아선 마음은 행복을 마음 깊이 증오하고 또 혐오한다. 물론 그처럼 화가 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부모와의 희박한 정서적 교류 및 유대감으로 인한 소외적 감각, 질병이나 장애 등 민감하고 고통스런 신체적 경험, 사람들 곁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한 부적응 내지 부자연스러움, 인간관계에서의 숨 막히는 이념 내지 폭력으로 인한 심한 감정적 동요 등이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 ‘바깥’에 대한 혐오를 동반하는 실존주의는 그의 숨을 트여주는 한편 텅 빈 마음의 박탈감도 보상해준다. 그러나 실존적 삶이 내면화하기 쉬운 적대적 이념은 무서운 ‘덫’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외부 검열 및 혐오는 정작 당사자의 취약한 마음을 (수치심이나 죄의식, 주도권 박탈을 피하기 위한) 히스테리적인 이념 속에 끝없이 가둬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헤어나기를 거부하는 그 음울한 전망으로 인해 마음의 치유를 향하는 문 자체가 차단된다는 점이다.

   텅 빈 마음의 폐허가 철학적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독자들이 ‘익숙한 불행’, 그리고 불필요한 자기혐오의 늪을 안전하게 여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가령 우리가 열의에 차 조각상을 빚는 조각가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심호흡을 한 뒤 심혈을 기울여 재료를 깎아나간다. 그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마음의 영상, 즉 상상의 결과물과 그것이 마음에 일으킬 ‘효과’를 투사(project)하고 있다. 마치 무언가를 향하고 있는 영사기, 프로젝터처럼 말이다. 한편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은 그 작업에 필요한 조각칼, 그리고 이미 부단히 연습한 바 있는 손기술을 내사(introject)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 두 가지 현상을 각각 ‘상상된 희망(목적)’, ‘현실화 방법(수단)’이라고 불러보자. 나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당분간 이 표현을 계속 사용할 것이다.

   독자들은 모종의 ‘시간 문제’를 해결해주는 조각상 대신 아무것이나 넣어도 괜찮다. 예를 들어 쿠키 만들기, 영화 촬영, 행정법 공부, 공무원 시험 준비, 거울에 비친 피부관리, 신학 공부 등 그 어떤 사례를 보더라도 기본 구도는 동일하다. 즉 마음 속에서 그것들이 수행될 때는 항상 상상된 희망과 현실화 방법이라는 두 현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조금 더 과감하게, 우리 마음에서 ‘착한 아이 증후군’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설명해보자.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예뻐하고 또 칭찬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들은 아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심하게 화를 내거나 아주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아이가 바라는 ‘효과’, 즉 상상된 희망은 부모의 사랑 그리고 혼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다. 그리고 그 경우 현실화 방법은 부모나 다른 애착 대상에게 ‘착한 아이’처럼 말하고 또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의 '목적'과 멀어질 아이의 마음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또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가 저마다 최소 단위로 삼는 ‘현실화 방법’의 형식은 꽤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모든 주장의 요점은 단 한 가지로 소급된다. 즉 ‘착한 아이 증후군’이 보여주듯 상상된 어떤 희망(목적)은 사실 언제나 신화적인 신기루라는 것이고, 실제로 그때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오직 현실화 방법(수단)과 그것을 쥔 자의 자유로운 의지 혹은 욕망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더이상 괴로운 희망에 붙들려 있지 않아도 된다. 그 순간 모든 의미부여의 거품은 밑바닥으로 꺼진다. 그리고 아이의 소망은 텅 빈 분노로 바뀐다. 충동적이 된 조각가는 자신이 쥐고 있던 조각칼로 소중했던 질료를 그어버린다. 는 더 이상 '바깥'의 사랑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충동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또 이용하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이때 아이 이전에 가졌었 희망 역시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과 환멸감을 경험한 아이가 ‘자유로운 주체’, 즉 실존적인 삶을 사는 주권자가 되는 과정을 간단한 비유로 살펴보았다. 아이(조각가)가 상상된 희망을 향해 가공하다 훼손해버린 질료, 그리고 그때 훼손된 희망과 함께 사라져버린 ‘나’는 사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조건부로 베풀어졌던 그런 ‘사랑’을 실제 내 마음의 필연으로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고통스럽게 내면화해야만 했던 ‘착한 아이’라는 미래상은 바로 부모라는 주권자가 아이에게 투사한 희망이었다. 즉 이 책의 1부에서 썼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그것은 게스트를 놓아줄 줄 모르는 타란툴라(호스트)가 상상한 희망이었다. 자신만의 현실화 방법을 쥔 부모에게는 자녀의 존재가 곧 ‘소중한 질료’였던 셈이다. 방금 필자는 ‘상상된 희망’ 또는 투사(projection)라는 표현을, 1부에서 권력(현실화 방법)과 한데 묶어 언급했던 ‘이념(답정너 논리)’의 작동과 실질적인 동의어로 만든 것이다.

   혹시라도 이 같은 조각가의 비유나 약속된 언어가 너무 난해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 내용을 너무 완벽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이 비유를 애써 사용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고대부터 현대까지 마음을 논한 서양 철학의 성과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독자들을 그 이념이 살았던 《밝은 방》 내부의 상상력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다. 재료를 두고 상상하는 조각가의 희망, 그리고 그가 동원하는 현실화 방법이라는 필자의 설명 이면에는 사실 ‘질료(hyle)’와 ‘형상(eidos)’이라는 오랜 역사적 구분이 있다. 그리고 마음을 잃어버린 철학자들의 ‘비판적’ 상상력은 그 가운데 후자, 즉 현실화 방법에 일관적으로 우월성을 부여해왔다. 다만 마음의 안팎에서 우월한 그 방법의 명칭이 이데아와 적도(to metrion), 관념과 실재, 기술(techne) 및 기예(kunst), 자연과 단자(monad), 지성(verstand)과 정신(nous/geist), 신체(Leib)와 지각, 습관과 윤리, 구조와 외연, 존재자와 차이, 기호언어와 호모 파베르 같은 형식들로 상세해졌을 뿐이다. 한편 상상된 희망의 우위를 말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처럼 ‘앉아서 코 푸는’ 사고 전통에서 이탈한 거의 유일한 예외다. 그래서 그가 우리 여정의 예비 단계에서 용병으로 고용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 보자. ‘실존화’된 아이는 더는 상상된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실에 던져져 있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시간 문제의 해결을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영혼이 간직한 아픔이 우리 안에 늘 잠들어 있다 해도, 포기되지 않고 계속 꿈꾸어지는 욕망(희망)은 우리가 아픔을 잊고 또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희망이 우리의 불안 속에 임시로 투여하는 진통제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아이가 삶의 황량한 실존에 그저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닌, 저 ‘바깥’ 세상에 대해 정력적인 이념을 가진 그런 실존주의자로 탈바꿈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전까지 결여된 아이의 희망은 여러 애착대상이 투사하는 희망에 스스로를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이제 그는 고통과 소외감을 계속 자극하는 세상의 경계를 침략하고 또 그 마음을 지배하려는 충동이 더욱 강해지고 의식 위로 수면화된다. 조금 유별나게 말하자면 그때 ‘이유 없는 영웅 후보자’는 ‘이유 있는 빌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신기루 뿐인 희망을 가졌던 아이의 분노와 박탈감이, 이제는 ‘바깥’의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희망을 짓궂게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소중한 질료’가 무화(無化)된 뒤에도 계속되는 파괴적 희망은 실존주의자라는 타란툴라에게 중요한 주제다. 예를 들어 니체는 ‘자유로운 빌런’이 된 자신의 마음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부르면서 자랑스러워했다. 20세기를 휩쌌던(사실 지금도 여전하다) 다다이스트 예술가들은 타인의 희망을 불쾌하게 만드는 정치적 ‘해체주의’에 계속해서 공을 들이고 있다. 한편 라캉은 자기 자신 및 매혹적인 타인이 상상하는 희망을 훼손하려는 가학-피학적 충동, 또 그처럼 텅 빈 마음의 ‘바깥’으로 상상된 대상을 정복하거나 그것에 굴복할 때의 향락에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이름을 붙였다. 결국 실존주의자의 마음은 결핍의 직접적인 해갈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공(公)적 희망과는 별개로, 이념적인 욕망이라는 저 사(私)적인 희망을 계속해서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처럼 파괴적으로 희망된 믿음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계속 보존되고 있거나 혹은 보호받아야 할 그런 필연적 중심이 없다. 모든 것은 각자의 해석일 뿐이고,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그 어떤 투명한 기준도 없다.

   그러나 이처럼 ‘텅 빈 마음’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를 아무리 끊어내고 또 감추려 해도 거기에는 항상 필연적 요소들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들은 특히 마음이 저 ‘바깥’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신체화 증상과 함께) 깊이 새겨지는 수축 경직에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자들은 가까이 있는 타인과 사랑을 주고받고 또 기꺼이 의지하는 능력, 그리고 타인이 주는 사랑을 영혼에 깊이 흡수하는 능력 면에서 매우 둔감한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긴장으로 과도하게 수축된 마음의 매듭 내부에서는 안과 밖을 안전하게 잇기 위해 선별된 권력(현실화 방법), 그리고 자기 내부 쪽으로 타인을 끌어당기는 이념 없이는 인간관계를 견디는 방법 자체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실존적인 마음이 앓는 허기와 그로 인한 본능을 지적하는 일은 너무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미 안으로 굽은 메마른 마음은 결국 타인을 자기 이념의 ‘밑바닥’으로 초대하지 않으면(혹은, 끌어내리지 않으면) 잘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타인이 우리의 덧없는 걱정이나 고민 따위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하다못해 내가 좋아하는 음악, 프로그램, 영화라도 추천해서 거기에 함께 어울려주기를 바란다. 하나의 사랑이 텅 빈 마음에 치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가 우리의 가시 돋친 이념에 공감하고, 그것을 견디고, 또 말없이 안아줄 때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깥에서 오는 ‘구원’만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여정이 소생시켜야 할 두 가지 커다란 줄기를 만난다. 즉 그것은 사랑을 통한 해갈의 타율적 경험, 그리고 영혼의 내적 필연성을 성장케 하는 예술의 자율적 경험이다.

   메마른 실존적 삶은 자기 개인만의 내적인 삶을 부드럽고 또 솔직하게 정렬된 고백체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실제로 그렇게 시도된 ‘조각 작품’들은 자신을 잘 묘사했다기보다는 다분히 뻣뻣한 결과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근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영혼을 잠식한 삶의 불행으로부터 충분히 치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불안정하고 또 예민하게 위축된 마음의 모양은 희망을 현실화하는 여러 방법들의 ‘간격’ 사이를 너무 정신분산적으로, 그리고 충동적으로 옮겨 다닌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스트레스를 풀러 노래방에 갔다고 치자. 흘러나오는 음향 앞에서 수축된 마음은 좀처럼 리듬에 자신의 호흡과 음성을 잘 싣지 못한다. 즉 신체화된 근육 자체가 ‘바깥’을 향해 부드럽게 풀어진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뻣뻣하게 말려 있어서, 그의 상상된 희망은 저 음정들이라는 간격(현실화 방법)들을 너무 분절적이고 또 기교적으로 흉내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실존주의자에게는 여전히 ‘텅 빈 자유’가 있지만, 그 내면의 자유란 이를테면 ‘바깥’에서 투사되는 선율의 그루브에 잘 녹아들지 못하는 불협화음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들뢰즈 같은 실존주의자는 이처럼 수축된 마음 상황에서도 예술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의 상상적인 본성이 결코 처음부터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각자가 놓인 상황 속에서 저 ‘바깥’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자유로운 소생의 힘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행한 마음 한복판에서 파괴적인 이념, 그리고 욕망과 더불어 반복되는 이 같은 상상된 희망을 ‘진정한 반복’, ‘시인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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