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행과 세상의 끝
우리는 불행한 마음의 반복적인 순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불행에서 빠져나오려면 과거의 뒤안길을 바라보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암시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어떤 사건적 원인으로 인해 성장이 멈춘 ‘내면 아이’를 찾아내는 일, 또 그 웅크린 마음에 알맞은 처방을 제공하는 일은 우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논의를 적극 심화하는 일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개인의 고유한 성장 및 성격 형성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트라우마성 발달 장애(Developmental Trauma Disorder, DTD)’를 총괄하는 시도는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가진 구체적인 속사정은 저마다 너무나도 다르다. 만약 내가 그처럼 막대한 상담 경험을 요구하는 영역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면, 이 책은 관련 서적에 비해 아무 쓸모도 없을뿐더러 비윤리적이고 불쾌한 그런 결과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째 문제는, 그런 과거 중심적 해결방안이 이 책의 중심 주제와 의도를 벗어난다는 점에 있다. 과거적인 접근은 오히려 우리의 끝없는 여정을 특정한 시간 좌표에 대한 일종의 집착 및 교착상태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 게다가 마음이 가질 수 있는 무수한 ‘진단명’들을 열거하는 글쓰기는 이 책을 마치 독자 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임상병리실이나 입원실처럼 아주 차갑고 무감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라는 실전과 대면해 매 순간 스스로 몸을 일으켜야 한다. 늘 현재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는 결국 앞을 바라보면서 이겨낼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전혀 말하지 않고 한 모순적인 생애의 역사를 뒤쫓는다는 것은 실로 기괴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여정을 안내하려는 이 책의 2부는 다음과 같은 난감한 요구 과제에 직면한다. 즉 그것은 우리 삶이 앞을 향해있으면서도 뒤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하고, 사람마다 다른 과거사나 자발적인 성장의 고유한 ‘속력’을 논의에서 배제하지 않고, 또 타인에 관한 이념적인(일률적인) 해석이 아니라 독자 자신만의 마음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찾아줘야 하는 듯 보인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우리가 당면한 삶과 당찬 야심도, 글쓰기와 사유, 사랑과 예술도 전부 소용없는 일이다. 그때 방 안에 놓이게 될 것은 단지 내담자와 훈육대상이 앉게 될 의자 뿐이다.
이 요구 과제는 언뜻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실제로 그렇게 기이한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혼의 아픈 과거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매듭지어지고, 하나의 교조적 이념은 이미 저마다 안으로 굽어진 마음의 ‘한계’에 대해 불감증적인 고문 도구일 뿐이며, 그런데도 마음은 불행과 치유의 어떤 보편적인 여정이라 할만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우려하는 점은 이 미묘함을 찾는 과정에서 독자가 어떻게 하면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신이 과거에 ‘잃어버린’ 마음, 하지만 실은 언제나 간직되어 있었던 그런 마음의 실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앞선 1부에서, 스스로를 밀실에 가둔 마음이 어떻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기모순을 반복하는 숙명에 처하게 되는지 언급했다. 우리 마음의 텅 빈 불안과 욕망은 저 낯선 외부세계를 조절하는 긴급한 문제를 내부에서부터 지배하기 위해 ‘어떤 것’을, 즉 여러 권력의 형식들을 배우고 또 받아들였다. 그 같은 내면화에 따른 자기억압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행한 건 나였지만, 내가 아니기도 했다. 그러니 삶은 내면화한 고통과 모순을 견디는 일이다. 또 일종의 ‘포기된’ 그런 미래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더 뭘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모든 삶의 ‘주체적’ 순간마다 나를 지탱한 것,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그때마다 더 우월했던 건 결국 투사(projection)가 아니라 내사(introjection)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삶의 고통이 그처럼 협소하게 만든 마음의 시야를 조금씩 역전시킬 것이다. 독자들은 ‘성장해가는 삶은 늘 거꾸로 선 진실의 외양을 띤다’는 언급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필자의 딱딱한 요약부터 미리 밝혀두자면, 마음의 투사는 언제나 ‘어떤 것’의 내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불행한 마음이 어떤 ‘한계’ 이상으로는 잘 낫지 않는 것도, 또 언젠가 마음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투사 덕분이다. 이 불친절한 개념적 정의는 절대로 단번에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자기 마음의 가장 외롭고 어두운 시기에조차 소등한 적 없는 《밝은 방》의 시야에서 벗어나, 저 어둠을 향해 한 발짝씩 모험을 감행할 때에야 조금씩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좀 더 분명한 윤곽을 보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는 몇몇 독자를 위해, 이론적인 지형을 둘러싼 최소한의 소묘가 필요할 것 같다. 상처 입은 영혼의 내밀한 움직임은 독자가 1부에서 보았던 내용보다 더 복잡하고 비밀스럽다. 1부에서 우리가 어두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스티로폼 조각과 그 이면에 놓인 소실점(텅 빈 마음)의 동선을 추적해왔다면, 지금부터는 천천히 해수면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내사된 것, 혹은 내면화된 것이라는 표현을 아주 모호하게 썼었다(저 두려운 바깥, 혹은 ‘시간’을 내부로 끌어당겨주는 ‘어떤 것’이라고 통칭했다). 그런데 사실 정신의학과 철학 영역에서 내사라는 용어는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 전자에서 그 용어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면서 출발한다. 예컨대 그때 내사는 부모님의 가르침이나 역할, 소위 ‘고급 문화’로 일컬어지는 코드들, 또는 영웅적인 정치인이나 지식인의 단정적인 말버릇 따위를 섣불리 받아들인 뒤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라고 믿어버리는 현상을 뜻한다. 이 경우 심리상담가는 내담자의 현 상태가 일종의 비정상(병리적인 것)이라고 선을 긋는 경향이 있다. 한편 현대철학에서 내사는 마음의 현상에 대해 좀 더 보편적으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가령 자크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내사되는 것은 언제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때 상징(‘기표’라고도 한다)이란 필자가 1부에서 권력이라고 이름 붙인 것과 거의 같은 뜻으로 보면 된다. 시계라는 분절적 상징체계를 잘 내사한 한국인은 10분 늦는 것에 엄청나게 당황해하고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시계라는 상징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사람 안팎을 신뢰하고 또 검열시키는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다. 일반적인 현대철학의 경향에서 볼 때, 필자처럼 《투사》라는 마음의 현상을 중시하는 입장은 일단 존재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물론 그때 투사는 마찬가지로 마음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주는 심리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더 보편적인 단어로 쓰인다. 예를 들어,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획투사(Entwurf, projection)’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기획 ‘내사’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호기심 많은 독자들이 이미 그 용어의 숨은 함의에 어느 정도는 친숙해졌기를 기대한다. 즉 그때 투사는 우리의 존재가 항상 저 두려운 ‘바깥(시간 문제)’을 염려하고 또 해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이미, 그리고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한편 라캉이나 들뢰즈 말고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이 같은 생각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가령, 안으로 굽은 마음과 거기서 비롯된 권력적인 해석은 모두 저 ‘바깥’에 위축되면서 형성된 아전인수격 이념이라는 하이데거의 생각에 불만이 있었다. 그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삶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도 ‘민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실상 하이데거는 ‘지난 수 천년 간 철학자가 한 일이라곤 자기 마음의 《밝은 방》에 앉아서 저 바깥 세계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한 것’이라고 폭로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의 지혜를 통째로 외면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괴한 ‘타협안’이 생겨난다. 즉 마음(존재)에서 투사가 우월하긴 하지만, 사실 투사는 그때마다 내사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있기 때문에 투사와 내사 사이에 어떤 우위관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같은 말이다." 오늘날 이 ‘타협안’은 실존주의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