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7>
2장.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깨어나라
(3) 타란툴라, 그리고 외로운 도시
이처럼 이념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견해를, 마치 현대사회가 축적해온 지식이나 기술, 코드, 문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처럼 이해하면 곤란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현실적인 공(公)과 이념적인 사(私)를 변별할 줄 알아야만 진정 내 마음을 지켜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러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해결해주는 권력 자체는 분명 기계적이며 가치 중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결코 완전히 닫힌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처럼 작동되는 현실 이면에서 꿈꾸어지는 욕망을 항상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엄격한 군대식 관료 체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효과적인 전투 수행을 가능케 한다고 여겨지지만, 거기 소속되어 시간을 보내는 구성원 중 임무 효율성과 인간관계에서의 이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뇌과학자나 진화생물학자들은 엄밀한 수학적 조작과 과학적 연구방법에 입각해 연구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지만, 흔히 이들이 우리 삶을 진화심리학적 앎으로 남김없이 해석하고 싶어하는 야망은 별개의 문제다.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에게 조언하는 몇몇 고마운 멘토들은 사업이나 부동산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게 해주는 현실적인 방법을 제안해줄 수 있겠지만, 이들 중 몇몇은 평범한 직장인처럼 돈의 운용법에 서툰 사람들을 멸시하는 특권의식에 취해있기도 하다. 또 여느 대학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대학생은 실제로 수험생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겠지만, 우리는 그가 느끼는 삶의 ‘보람’이 모종의 우월감이나 배타적인 부족적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텅 빈 마음은 자신의 이념이라는 ‘덫’이 매혹한 타인들의 반응을 토대로 생의 의미, 그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연명해야 할 외로운 숙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잠깐 화제를 돌려보자.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Taranto)라는 도시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있다. 이 도시의 명칭은 타란툴라(tarantula)라는 독거미의 어원이 되었는데, 해당 지역에서는 수 세기 전부터 무도병(舞蹈病)이라는 미스터리한 병명이 유행했다고 한다. 거미에 물려서 생기는 그 병은 ‘자기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춤에 대한 충동’을 증상으로 가졌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되었을 때 탈진할 때까지 미친 듯 춤을 춰야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빠른 템포를 가진 나폴리 지방의 무용곡 타란텔라(tarantella) 역시 여기서 명칭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타란툴라의 습성은 다양한 종 만큼이나 각양각색이지만, 주로 촉각이 엄청나게 발달해있고 또 자신만의 은신처를 갖지 않으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한편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철학자도 이 동물의 이미지에서 기묘한 영감을 얻었다. 사실 필자의 관점은 니체의 이념적 인간론이나 그가 사람에 대해 취했던 혐오적 의심 모두와 배치되는 면이 있지만, 그가 타란툴라를 연상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는 사실은 재미있게 느껴진다(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2부 7장은 「타란툴라에 대하여」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사실 그 타란툴라는 사람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전설이 아니었을까? 타란툴라에 물린 사람이 또 다른 타란툴라가 되어, 치유되기 위해 탈진할 때까지 맹목적인 춤을 추게 되는 그런 숙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기에게 적합한 이념을 타인에게 새겨넣고픈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 그런 이념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내면화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마음의 ‘무도병’을 앓는다. 즉 우리는 어떤 우연한 사건들이나 낯선 타인의 개입 없이는(혹은, 설령 그런 일이 반복된다 해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념적인 삶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만약 여러분 주변에 특정 취미나 주제를 나누는 사교 모임이 있다면 아무 곳이나 나가보라. 그러면 독자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 속에 이념이라는 ‘덫’을 놓고 타인을 끌어들이려는 각양각색의 마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발언권을 거의 독점하면서 자기 이념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비교적 신비주의적이거나 혹은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텅 빈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는 자신의 이념적 권력을 기준으로 세우면서 그것을 공격적으로 치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누가 거품처럼 과장된 욕망을 가졌고, 또 누가 비교적 덜 그래 보이는지 추적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늘 후자의 경우에서 더 큰 인간적 매력과 자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같은 ‘마음 본능’은 심지어 권력을 뽐내고 있는 당사자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물론 몇 마디 잡담만 나눠도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정력적인 이념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개인의 이념 정도는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념은 그때 우리의 상처 입은 내면을 지켜주고 또 사회적 삶을 영위케 하는 그런 최소한의 경계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은신처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정말이지 타란툴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영혼이 늘 목말라 있는 근본 원인은 우리가 마음의 균형을 가까스로 통제하기 위해 둘러친 이념의 울타리에 있다. 즉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무엇인가를 지레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가 “저 포도는 어차피 신 맛이 나는 포도일 거야.”라고 스스로 되뇌이듯, 사람들은 자기가 내면화한 이념이라는 보호구 없이 세상에 나가기를 꺼린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나 습성을 이해해주고, 따뜻한 애정을 먼저 감추지 않고 표현하고, 말없이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고, 우리가 겪은 고초에 깊은 아픔과 연민을 느끼고, 또 그런 내밀한 꿈에 동조하며 함께 싸워줄 사람을 기다린다. 이는 좀처럼 자기 말을 꺼내지 않고 경청하기를 선호하는 그런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간 문제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념적인 경직성과 예민함을 지닌 텅 빈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원천이 잘 마르지 않는 그런 여유와 활력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그리고 종종 그런 사람과 이유도 모른 채 사랑에 빠진다. 비록 그 관계의 끝은 대개 상대방의 연극적 모순이나 우리 자신의 욕망 어린 환상에 불과했다는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더라도 말이다. 타란툴라와 같은 우리 영혼의 숨은 갈망은 우리가 은신처 속에서 방어적으로 설정한 인간관계의 ‘이상형’, 즉 이념이 만든 환상을 무력하게 압도해버린다. 가부장적인 도덕을 내면화한 사람은 천진하고 제멋대로인 이성에게 ‘불쾌한 매력’을 느낀다. 이는 마치 부족한 것 없는 왕국의 자스민 공주가 명랑한 ‘천민’ 알라딘에게 매료될 수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제아무리 독립심이 강하고 또 성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투명한 마음에 대한 이 같은 본능적 이끌림과 의미부여는 우리 안의 목마른 타란툴라에게 작용하는 일종의 보편적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아가씨》에 등장한 대사인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이정하 시인이 쓴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같은 표현은 이 같은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같은 낯선 사랑의 ‘종교성’, 그리고 이념에 의한 통제불가능성이 가져오는 긴장과 당혹감을 두려워한다. 방어적으로 작동하는 마음이 흔히 공격적인 증오, 혹은 강렬한 죄책감 등으로 뒤바뀌는 양가감정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독자들도 어디선가 들어봤음 직한 대사인 ‘네가 나를 유혹했다’, ‘내 마음을 갖고 놀았다’는 말에 담긴 전형적인 심리적 투사(projection)는 이런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수치심, 맹목적인 반감, 불안과 소유욕, 급격한 분노나 혐오감, 의심과 질투심에 시달리면서 거기에 대한 자신의 성벽을 더 공고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비교적 동질적인 이념에 함께 속할 수 있는 ‘안전한’ 사람들과의 자기동일시는 더욱 끈끈해진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종교적 관계’의 내막은 실제로 일종의 ‘콩깍지(환상)’나 나르시시즘적 연극의 소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감’이 넘쳤거나 혹은 아주 여유 있어 보였던 이유는 되찾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 실은 단지 그 사람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였던 것이다. 삶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점차 견고해가는 우리 내면의 이념은 결국 거의 평생에 걸쳐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믿을 것은 이념 뿐이다!”. 우리가 가끔 듣는 철학적 ‘해체주의’라는 이념이 여전히 유행을 타는 것은 이러한 경험적 설득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타란툴라를 멈춰 세우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수렴청정(垂簾聽政)에 위선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인의 마음을 잡아먹으면서 이를 망각하고, 또 타인을 붙잡아 곁에 두고 기르는 그런 외로운 숙명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자가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텅 빈 마음 어딘가에는 실제로 우리가 잃어버린 뭔가가 있으며, 우리의 욕망이 직조하는 모순의 일관성을 스스로 감내하며 사는 버거운 삶은 그 숨겨진 필연성 안에서 끊임없이 구조 신호를 보낸다는 진실 말이다.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내면의 윤리는 반드시 발견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과제다. 그럼에도 이 같은 마음의 ‘막다른 경계’를 지켜주는 일만으로는 우리가 바라는 치유에 접근할 수 없다. 마음의 이끌림과 해갈은 그저 서로 간의 ‘다름’에서 오는 그런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어디론가 솟아날 구멍, 마음의 회복과 다시 태어나기 위한 ‘빛’을 찾고 또 그 살아있음을 만끽하려는 몸부림이다.
현실을 사는 우리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저마다 감춘 내면의 별을 발견하는 데 결국 실패한다면, 저 모순적인 삶의 의욕이 주는 영원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리하여 결코 부분으로만 남을 수 없게 된 우리가 어떤 편향적인 이념 전체에 목을 매며 인생을 허비한다면 우리는 아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니, 후회조차 외면하는 삶을 꾸려가게 될 것이다. 이 책의 2부에서 나는 우리 스스로 헤어나오기를 거부하게 되는 이 모든 ‘익숙한 불행’의 늪에 조금 더 다가서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 깊은 어둠의 끝에서 놀라운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