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6>
2장.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깨어나라
(2) 이념이라는 '덫'
이쯤에서 지금껏 나눴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나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시간(바깥)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고, 또 우리는 이런 외부 문제를 언제든 제어하고 또 충족하려는 취지에서 그것을 언제나 내부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욕구의 충족이나 상황의 통제가 우리 내부에서 긍정적으로 예측 가능해지려면 반드시 외부의 ‘어떤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때 내면에 심어지는 ‘어떤 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부모님의 존재 및 역할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이목을 끄는 행동이나 외모일 수도, 또 일상적인 생활 습관이나 사회적 규범, 혹은 시험 성적표나 경제 관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마음에서 그것들은 어떨 때는 수단적이고, 어떨 때는 그 자체 목적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처했던 시간 문제를 해결할 때 ‘어떤 것’이 발휘했던 효과를 받아들이고 내면화(내사)하면서 자라났다.
이처럼 안과 밖을 내부의 상황에서부터 제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 그 모든 해결사 작용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 권력을 얻고 또 내면화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규칙부터 배워야 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분명 그 방식을 우리의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보면 사실 그 억압을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이 전혀 아니기도 했다. 예컨대 어려서부터 외모나 능력을 꾸준히 평가절하당한 사람이 미모와 실력을 욕망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자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유는 곧 상실한 낙원과 같은 부자유가 되었고, 우리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마음을 잃어버린다. 불안한 마음은 내면화된 규칙으로 통제 및 해석되지 않는 그런 타자(외부)를 투사적으로 혐오하고 또 기피하게 된다. 한편 갈 곳을 잃은 욕망이 바깥에서 섣불리 내면화한 ‘어떤 것’은 마음 안팎의 모순과 분열, 자기소외와 마음의 질병을 지속시킨다. 현실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우리도 스스로를 멈추는 법을 알지 못한다. 마음은 《밝은 방》 내부의 폐쇄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꾸려간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권력을 필요로 한다.
자기 마음의 빛을 그렸던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너무 멀쩡한 세상이 나를 미치게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도 종종 비슷하게 느낄 때가 있다. 가령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잔인하리만치 멀쩡하고 또 기계만큼이나 점잖은 어떤 것이어서, 나 하나 죽거나 사라진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서글프지만 그 생각의 뒷부분은 상당 부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거의 ‘비인간적인’ 명시적 합리성으로만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믿음일 뿐이다.
한편 그것과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즉 세상은 신화적인 폭력과 이기심으로 반쯤 미쳐 있는 반면, 자신은 비교적 합리적인 진실과 투명한 비판정신의 균형을 끊임없이 추구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은 그렇게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물론 스스로 합리적이거나 비판적이라고 일컫는 일반적인 주장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결코 얻는 것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뭔가를 보편의 이름으로 주장할 때는, 나름대로 판단의 사실적 근거와 경험적인 통찰력을 끌어와서 명시적인(‘현실적인’) 논리를 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리가 끝없이 직조되어 나오는 일관된 배후에는 사실 그 당사자 특유의 내면적인 요구가 일종의 전체로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 심리학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때 우리의 논리적 인식은 우리의 불안과 증상들이 이미 기피 및 혐오(투사)하고 있는 것, 또 우리 마음의 상상력과 욕망이 벌써 자기동일시(내사)하는 권력 작용을 정당화하고 확장하려는 경향을 띤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같은 유한한 마음의 현상을 ‘초월 논리학(transcendental logic)’이라고 불렀다. 이때 초월 논리학이라는 용어는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형이상학 저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질 들뢰즈는 그 같은 이념의 작동원리를 ‘감각의 논리’라는 신체론적인 용어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철학자들의 통찰력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 즉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여정을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것을 예비하는 과정에는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너무 무거운 전문용어 대신 ‘이념적인 논리’, ‘순환 논리’, 아니면 ‘답정너 논리’ 정도로 불러보도록 하자. 답정너 논리의 심층에는 언제나 취약한 마음이 잠복해있다. ‘멀쩡한’ 세상에 나온 그의 진술들은 일단 ‘객관성’이라는 기성복을 걸치고 출근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념은 근거가 전혀 필요치 않은 권력적인 욕망들, 또 마음이 겪은 고통과 상처들을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겉으로 현실이 되어온 삶의 모든 노력들과 명시적인 논리의 순환은 우리의 영혼이 그때그때 내면화한 도구이자 가면이었던 셈이다.
권력 작용이란, 시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자신을 기꺼이 억압하면서 쓰는 수단 같은 것이다. 가령 낯선 야생의 격오지에 떨어진 사람이 날짐승과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불 지피는 기술을 익히고 또 그것을 언제든 활용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념은 아직 구체적인 현실이 되지는 않은, 그러나 권력을 사용하고 또 옮겨가는 방식 및 취향에서 분명 어떤 일관성을 보여주는 마음의 실체를 가리킨다. 즉 권력은 그 자체 가치중립적이지만, 그것을 빌리는 이념은 어떤 가치 편향성을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종 누군가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답정너 논리’가 순진하긴 해도 최소한 그가 상대방의 이념적 일관성을 어렴풋이 알아보고 있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의 순환은 우리가 아는 ‘현실적 사건’들의 암묵적이고 잠재적인 지배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념적인 욕망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내가 전달하려는 핵심은 이렇다. 즉 우리는 저 외부인의 이념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섣불리 내면화(내사)할 수 있는 이념으로부터 자기 마음의 숨겨진 진실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념은 정확히 뭘 가리키는 말일까? 우리는 사실 이미 그것에 대해 다른 표현들로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이념’은 철학사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부터 유래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은 내면의 진실을 목표로 하는 만큼 더 친숙한 방식으로 수수께끼에 다가설 수도 있다. 짧게 말해 이념이란 우리 각자의 마음이 외부세계를, 특히 저 사회적 타인들을 우리의 내부 쪽으로 끌어오고 또 동화(同化)시킴으로써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완수하려고 애쓰는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를 에워싼 일상들을 떠올려보면 이념이 별로 어려운 단어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신실한 불교 신자나 교회 목사가 사람들을 전도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이념이다. 헬스 트레이너나 바디 프로필에 심취한 사람이 주변인에게 운동을 반쯤 강권하는 경우가 보인다면 그것도 이념이다.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된 사람,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자란 축구 선수가 자녀에게 자기가 당연시하는 내적 규율을 훈육하고 싶어 한다면 이 또한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한 연인관계의 성립과 지속에도 개인의 이념은 꽤 강력한 영향을 준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념의 의미가 결코 정치적인 진영논리나 체제 담론 따위에 국한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모든 현상을 포섭하는 마음의 근본 작동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념은 마음의 《밝은 방》 같은 것으로, 거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이념은 안에서부터 바깥을 투명하게 통제 및 파악하고 싶어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권력 작용이 그 역방향으로 침투하거나 행사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바깥에서 볼 때 안쪽의 중심은 불투명하게 보여야 한다. 이념은 마음 내부에서 중시하는 ‘상식’과 규범을 외부에 소급 적용하기를 좋아하며, 그런 목적을 현실화하기 위해 권력을 필요로 한다. 또 이념은 자기가 내면화한 권력과 그 목적을 함께 공유하는 ‘아군’에게 호의적이다. 반면 그러한 권력의 내면화를 거부하거나 잘 포섭되지 않는 경계 밖의 타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성립하는 인간관계는 언제나 권력이 발생하는 중심과 그 주변이라는 첨탑의 제국주의적 외양을 갖게 된다. 가령 그것은 “내 집에서는 내 룰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와 그 자녀의 관계 같은 것이다.
마음의 이념적 팽창주의는 언제든 룰의 적용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호스트, 그 주변부에서 항시 권력적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게스트, 그리고 그 바깥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욕망하고 또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세상을 부자(호스트), 서민(게스트), 반체제주의자(바깥)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통상적인 종교의 마음 체계에는 고위 사제(호스트)와 평신도(게스트), 그리고 이단/불신자(바깥)가 있다. 심지어 이러한 폐쇄적인 마음 메커니즘은 가장 ‘진보적인’ 정치 집단 내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이념은 마치 신앙인이 교리를 전파하듯이 외부요소를 내부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이념이 발생하는 체계의 중심부로 향할수록 우리의 시선에는 그 체계의 작동방식이 비교적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반면 권력의 바깥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외지인(바깥)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내부의 작동원리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념적인 권력의 호스트 위치에 가까운 사람이 게스트를 검열시키거나 혹은 그 체계 작동을 비교적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거기에 속한 게스트들의 마음이나 잠재가능성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칼 슈미트라는 법철학자는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주권자는 우리의 맥락에서는 호스트를 뜻한다). 이때 어떤 독자들은 대통령이 국가적 ‘예외상태’로 선포하는 계엄령, 그리고 그것과 갈등을 빚는 국민의 주권 개념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그것보다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예시가 우리의 관심을 좀 더 근본적으로 해명해준다. 예컨대 어떤 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말하는 예절을 가르치고, 방 정리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야 하며, 영어 일기는 저녁마다 써야 하고, 휴대폰은 하루에 4시간만 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녀가 잘하고 있는지 매일 ‘검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자녀가 똑같은 규칙을 손에 쥐고 부모를 ‘검사’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부모는 살짝 당황하거나 자녀가 무척 버릇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 사건이 있은 뒤로는 교육 목적상 자기 행동에 대한 검열을 강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위를 세워야겠다’는 식으로 충동적인 다짐을 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모가 자기 이념에 맞게 만든 ‘답정너’ 룰이고, 따라서 자신은 처음부터 그 룰에 대해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부모의 이념적 권력을 얌전히 내면화함으로써 유지되던 가정의 ‘평화’는, 어느 날 자녀가 스스로를 예외상태(호스트) 혹은 이념의 ‘바깥’ 그 자체로 선포함으로써 언제든 깨지거나 조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게스트들이 실제로 타인의 이념과는 무관한 자기만의 이념, 그리고 고유한 마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선포가 엄청나게 파격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이것은 물론 자녀에게 애정과 자본이 필요해서인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녀에게 부모라는 모델은 저 두려운 시간(바깥) 문제를 해결해주는 힘 그 자체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스트의 ‘덫’에 걸린 게스트는 자기 마음에 꼭 맞지 않는 그런 가학적 이념을 상당 부분 내면화하게 된다. 한편 우리는 이 책의 1장에서, 부모가 자신을 애지중지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는 그런 특권의식을 내면화하면서 크는 자녀들도 있다는 사실도 짧게 언급했었다. 그때 자해공갈을 하는 아이의 피학적인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규칙의 예외상태로 고집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거꾸로, 무조건적인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자녀가 호스트인 반면 부모는 게스트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애증의 관계에서는 이념적 ‘갑질’을 선점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힘겨루기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독자는 내가 너무 빡빡하게 군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이념적 욕망이란 요사이 유행하는 단어인 ‘가스라이팅’의 비밀스런 마음 본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목표가 있는 우리에게 핵심은 가학이나 피학이라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만약 그런 환상에 심취한다면 가령 국가는 가학적인 반면 국민은 피학적이라는 식의 우스운 블랙 코미디에 홀려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서 독자가 얻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저마다 다른 마음의 모양을 가진 이념적 호스트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이념적 욕망 너머에는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진실이다. 텅 빈 마음 어딘가에는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 그 빛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러 이념들의 ‘덫’에 걸려 꾸는 꿈에서 반드시 먼저 깨어나야 한다.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욕망은 이질적인 타자의 내면에 실제로 큰 관심이 없으며, 우리 마음에 대한 월권과 이로 인한 우리의 방황 및 고통에 대해서 절대로 책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