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4>
1장. 현대인의 마음과 버거운 삶
(3) 권력추구와 멘토링의 신화
이런 설명을 처음 듣는 독자들은 이게 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혹은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닌 듯 여겨지면서도, 막상 구체적인 사례들을 떠올리는 상상을 펼치려고 할 땐 머리가 약간 뻣뻣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삶이란 기본적으로 안으로만 굽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든 혹은 어떤 상황에 관한 ‘합리적인’ 해석에 있어서든, 적어도 우리는 늘 해오던 방식을 가지고는 산조차 옮길 수 있고 또 세계일주에도 도전할 수 있는 그런 베테랑들이다.
그러나 각자가 외부세계를 읽어내고 또 조작할 때 습관처럼 반복되는 내부의 고유한 원리들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시간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의 내사적 작동은 어떤 것을 거머쥐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욕망을 현실화해 주면서도, 그와 동시에 소위 ‘방어기제’라는 것으로서도 순간마다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그런 매듭, 아니면 고유한 원리로 겹겹이 닫혀 보호를 받는 그런 비밀의 방과 같다. 그것은 마치 나선형으로 휘감겨 들어가는 장미나 연꽃처럼 각자의 내면에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얽혀 있다. 잃어버린 마음은 바로 그 밀실의 중심에 홀로 웅크려 명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자신의 삶 전체를 기꺼이 속여 넘길 수 있는 저 《내사 기제》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또 그것이 우리의 ‘성숙해가고 또 안정되어가는’ 욕망을 얼마나 맹목적으로 강화해나가는지 해명하면서 이 책의 1장을 끝맺을 것이다.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문화에는 여러 고유한 유익함이 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지극히 ‘보수적인’ 기능도 수행한다. 경험 많은 독자들은 어떤 지적 교양이나 정치적인 이슈, 자신의 직무와 직결된 이야기, 교육적이거나 가족적인 가치관, 스포츠 취미나 외모적인 가십, 명품 소비와 뒷담화, 혹은 주식 투자나 사업과 관련한 주제 따위를 선정하지 않으면 활기찬 대화를 시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관광명소나 패키지 상품이 아니면 여행을 못 다니는 사람, 또 정형화된 낭만적 패턴(“영화, 밥, 커피, 그리고 장미와 밸런타인데이”!)가 빠지고서는 어색해지는 그런 로맨스도 있다. 우리가 거쳐온 사회생활은 또 어땠는가. 거기서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겪은 조직문화나 소비문화에서 스펀지처럼 학습한 대우 및 말하기 스타일(소위 “갑질”)을 깔고 가지 않는 한 수평적 관계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문화의 ‘보수적’ 기능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문화를 수용하는 마음의 보수주의란 곧 개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필연임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가 나름대로 익숙해진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다. 독자들은 약한 살갗과도 같은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과 밖의 중심점을 언제나 내부 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내사되는 문화의 기본적인 역할은 이렇다. 즉 외부와 관계 맺는 방식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언제든 예측 가능하고 또 교환 가능한 편리한 형태로 조립하는 일이다. 여기서 외부에는 물론 내가 알기 어려운 무수한 타인들도 포함된다. 요즘에는 종종 전화를 받는 것이 무서워서 문자로 소통하는 것만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믿는 종교나 학문의 담론이나 개념어를 들먹이지 않으면 뻣뻣한 대화밖엔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혐오 담론의 표적일 수 있는 말과 행동이 감지되는 타인에 대해서는 낙인을 찍거나 ‘손절’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경계선, 즉 우리가 내부에서 설정한 어떤 기준이 각인되지 않은 인간관계 또는 대화 도중 대책 없이 엄습하는 그런 침묵을 껄끄러워한다. 마음은 보통 직접 닿는 것을 어려워하므로 우리는 소통에 있어 늘 ‘어떤 것’을 수단과 목적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시간 문제’를 해결하는 현상은 곧 모든 권력 작용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이라고? 그게 대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사실 권력이란 우리가 흔히 공상하듯 ‘소시민들’과는 전혀 무관한 그런 빅브라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 바깥, 곧 시간의 문제를 우리의 닫힌 내부에서부터 “일방향적이고 또 항상적으로(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조작하고 또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결사를 말한다. 만약 우리가 청소를 하려고 손에 청소솔을 움켜쥔다면 그것은 권력 작용이다. 우리가 열심히 꾸미는 매혹적인 외모 역시 권력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외모를 통해 시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불특정 타인들을 아쉬움 없이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즉, 내가 외부의 고충들을 세심히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다). 또 독자의 수중에 돈이 충분하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망을 환전할 수 있으므로 그것도 권력이다. 공인시험에서 받은 점수도 권력이다. 미디어도 당연히 권력이고, 새로 제정된 법도 권력이다.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
이제 독자들은 마음이 움켜쥐는 문화가 이 같은 권력 작용의 보수성을 암시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은 임시적인 ‘나’를 구성하고 또 ‘나’에 관한 명시적 해석을 제공한다. 안쪽에서 볼 때 권력은 외부세계를 ‘나’에게 친숙하고 제어 가능한 것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이다. 반면, 바깥의 시점에서 보면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타인들은 자연스레 배제되는 가운데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된다. 기묘한 것은 이때 권력을 받아들인 내면은 마치 타인들이 ‘나’를 항상 바라보고 있는 듯이 행동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타인들의 실체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학벌주의가 만연해있는 사회를 예시로 들어보자. 어떤 사람의 자존감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마음을 많이 잃어버린 사람일수록), 그는 자기가 명문대에 입학하기만 하면 (자신이 얼마나 빈약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사는지와 같은) 내면의 진실 따위는 무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높은 점수에 대해서는 과도한 월등의식을 느끼고, 반대로 낮은 점수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수준의 열등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그는 상상된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가치를 측정하고 검열한다. 동시에 자신 또한 그런 기준점을 외부에 대한 권력으로서 충실히 활용한다. 즉 학벌이 높은 사람은 선망하고, 학벌이 낮은 사람은 약간 무시해도 좋다고 여긴다. 또한 그처럼 강화되는 믿음을 사회에 퍼뜨리거나 혹은 그것을 유지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때 마음은 실상 타인에 대해 무지(無知)한데다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는 ‘나’의 가치를 타자로부터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결핍된 마음이 앓는 결벽증적인 이원화 환상을 《밝은 방》이라고 부른다. 창밖이 칠흑같이 어두운 여느 새벽, 도시에 사는 어떤 사람이 실내에서 혼자 공포영화를 보고 있다. 실내에 밝은 조명이 있고 또 창문의 커튼이 걷혀있다면 아마도 바깥에서는 집 내부가 들여다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내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영화가 끝났지만, 신경이 곤두선 집주인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는 조명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커튼을 모두 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바깥의 상황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는 불을 켠 상태가 아니면 잠이 오지 않는다. 사실 여기서 나타나는 마음의 딜레마는 사회 단위에서 소위 “판옵티콘”을 작동시키는 원형처럼 작동한다. 그때 사회적으로 적응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타인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다루고 또 조직하는 권력적 방식에 대해 학습하고 또 그것을 점진적으로 내면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텅 빈 욕망과 불안이 밝은 실내에서 키워갈 성공에 관한 맹목적 믿음은 ‘자아 실현’과 사회적 ‘역할’의 주요한 동력원이 된다.
흔히 세간에서 찾는 ‘마음 전문가들’이라면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이를테면 심리치료 상담가들, 자기계발의 귀재들, 뇌과학자나 진화심리학자 등 인간과학자들, 비움과 긍정의 전도사들, 철학자들과 종교적 안내자들, 연애 관련 조언의 대가들, 일상을 말하는 에세이스트들과 문학적 작가들은 우리가 오늘날 접할 수 있는 마음의 멘토들이다. 사실 그 가르침들은 (적절히 활용하기만 한다면) 실제로 내면의 힘을 기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지혜로운 앎이란 결국 조금씩은 겹치는 법이고, 또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역시 그것을 직관적으로나마 느낀다. 살면서 우리는 내면에서 폐쇄적으로 반복되던 무언가가 트여 열리면서 변화를 맞는 경험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제야 인생이 조금은 알만한 것이 되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러 권위적인 스피커들은 막상 그 모티프가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거나, 혹은 애초에 다양한 타자의 사례를 포용하기 어려운 그런 편향된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타인의 가치나 미래 향방을 이리저리 헤집고 통제할 수 있다는 가학적 효능감에 도취해 있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받고 싶어서 책임 못 질 연극적 언사를 늘어놓는 일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자기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은 그런 맹목적인 지지와 위로를 통해 멘토링의 자족적 동기를 길어 올린다. 종종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하는 멘토들이 자신과 타인에게 가하는 채찍질 역시, 한갓 위태로운 신화적 환상과 특권적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것으로 판명되는 사례가 잦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을 신봉하는 심리상담가들은 외려 그 자신의 트라우마성 발달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무감각한 자세로 이론을 내사한 뒤 그것을 내담자에게 너무 순진하거나 오만하게 투사해버리곤 한다. 혹은 이따금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든지, 쓸모와 욕망으로 회전하는 현실에 무력감 그리고 현기증을 느낀 사람은 어떤 것을 ‘비워내는’ 삶을 종교화하는 신념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또 우리는 후천적으로 발달한 주위의 ‘연애 고수’들이 진실한 사랑의 문제 앞에서 너무 기계적인 전략과 단정적인 언어 습관을 갖고 있는 경우들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실상 그들은 과거의 낮은 자존감과 결여를 언제든 보상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취해서, 잃어버린 마음의 텅 빈 구멍을 욕망어린 확언으로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약간 조심스럽지만, 나는 우리 자신보다 단지 한 발짝만 더 앞서있을 뿐인 그런 멘토들에 대해 독자가 갖기 쉬운 환상을 깨주고 싶다. 삶과 지식의 전문가라고 해서 마음에 대해서도 그러하리라고 섣불리 믿는 것은 위험한 베팅이다. 그리고 섣부른 내사는 결국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이나 음식을 억지로 나눠 갖는 해프닝에 그칠 수 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다고 느낄 것이다.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사람은 타인에게 힘이자 의미일 수 있음을 서로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에서 치유되는 게 아니냐고, 또 거기서 내부적으로 되찾은 인간관계의 자신감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한 가장 견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은 옳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다만 필자가 1장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그게 결코 우리가 일생에 걸쳐 찾아 헤매는 그런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 관한 애정과 경험적인 지혜가 빛나는 멘토링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서 즉각적인 효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신념이란 것도 결국 또 하나의 막다른 길에 지나지 않는다.
두려운 시간에 대한 우리 내면의 태도에서부터 유기적으로 이해되지 못한 그런 앎은 절대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다. 마치 허기진 갈매기가 집어 먹은 플라스틱 조각처럼, 그 지식은 소화조차 되지 못한 채 몸 안에 남아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밝은 방》 내부에서 너무 쉽게 읽힌 세상, 또 너무 쉽게 되찾은 ‘진실’은 필연적으로 그 섣부르고 공허한 욕망에 따른 부작용을 댓가로 지불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근본 이유는 분명하다. 늘 어느 정도는 아전인수식으로 세상을 거머쥐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실제로는 삶과 시간의 진실에 대해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 있어서 어떤 우상(idol)에 대한 신화적 환상 내지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막다른 길들을 맞닥뜨린 뒤 성급한 묵시론 및 허무주의에 젖어 탈출하지 못하는 환멸감 역시 문제가 된다. 환멸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최근까지 유행 중인 소위 ‘실존주의’ 사상은 불행한 마음의 습관들을 타인에게 책임질 수 없는 방식으로 조장하고 또 전염시키는 경향이 있다. 대단히 예리한 감각을 가진 문필가이고 또 철학자라고 해서 두 번째 사는 삶일 리 없다. 몇몇 다정한 독자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자기 방식의 염세적 신념과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품는 상대방(멘티)에 대해 비하적인 감정을 품거나 혹은 심지어 증오심까지 갖는 ‘비판적 지성들’이 많이 있다. 세계의 일반적인 진상은 실제로 거의 미화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고통스런 생 앞에 토라진 내 마음의 ‘자유’를 타인에게 함부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책을 계속 따라오는 독자는 평소 믿음직스럽고 친절해 보였던 우상들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이방인 내지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결국 걸어 다니는 진실에 스스로 근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대개 사람들은 ‘나’와는 무관한, 그 자신의 손아귀를 뿌리치는 그런 마음의 진실을 껄끄러워한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십자가를 진 성자라도 되는 양, 타인을 배려해주고도 오해를 산다거나 혹은 의도적인 공격을 받아 상처 입고 또 소외당할 수 있다. 여러분이 회복되면 회복될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취약한 마음은 단순히 어떤 것을 함께 신봉하거나 혐오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동료관계를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독자가 박해를 받을 가능성은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갖게 되는 유일한 걱정거리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글쓰기를 중단할 생각은 없다.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당신은 마치 토끼를 쫓는 앨리스처럼 이곳까지 당도했을 것이다. 결심이 섰는가? 그렇다면 이제, 마음이 발하는 저 희미한 빛을 천천히 따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