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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Jul 28.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3>

1장. 현대인의 마음과 버거운 삶

(2) 박탈된 마음의 주도권


   이 급조된 이야기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된 한 사례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변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왜곡되고 분열되는 현상을 대략적으로 소묘해준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조건적이고 인색한 사랑, 자의적인 기준에 따른 부정적인 평가 내지 폭력은 일생에 걸쳐 마음에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친다. 충족되지 못한 유년기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갖은 욕망과 피상적인 행동들을 내면화하게 만든다. 오늘날 정신과에서 흔히 분류하는 성격 및 인격 장애, 증상적 장애라고 부르는 목록들은 그런 마음의 병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한 인간에 대해 내놓는 일률적인 진단 및 치료방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인간 내면의 엄청난 풍요로움과 잠재성에 대해 둔감한 전문가들의 병리학적 소견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삶의 장애물을 해소하는 차원에서는 과거의 사건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그런 부정적인 접근만으로는 잃어버린 마음을 온전히 되찾기 어렵다. 필자로 말하자면 차라리 예술이나 문학, 사유, 그리고 사랑을 통한 긍정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회복을 훨씬 선호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주제는 잠시 미뤄두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자.

   대체로 사람들은 저 어머니의 딸과 동일한 상황, 혹은 훨씬 더 불만족스런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결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 순간 일정한 삶의 양식과 믿음을 실제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목적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는 아이디어에 대해 어설픈 낭만주의거나 또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인 양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이 만연하게 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한 개인에 대한 세상의 평가 기준에는 분명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회 구성원들의 맹목성이 서로 간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여러 문화권력(사회적 메시지들)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지 임시적이고 실험적인 집단 소통망의 역할을 수행할 뿐, 우리 자신을 논쟁적인 열정에 투신하게 만든 모든 혐의에 대해서 훗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문화적 담론에 이입된 전형적인 사회 구성원은 스스로를 마치 그 퍼즐판이나 체스판의 한 기물(己物)인 것처럼 인식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담론에 대한 관여 및 판단 자체를 자기자신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자 일종의 최대의 진실인 듯 상황에 이입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해당 퍼즐판이 깨어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바꾼다. 이러한 현상은 찬반 토론회나 학문적 패러다임 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서로 다른 조직문화, 동료들끼리의 여론 파벌, 교육적 신념, 정치적 논쟁, 또 종교재판이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에서도 똑같은 일이 무수히 반복된다. 거기서 당장의 ‘나’는 개별적 입장 혹은 ‘스탠스’라고 하는 형식적 기물 위에 올라탔다 사라지는 어떤 익명성으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언뜻 위험한 관점처럼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절대 완벽할 수 없고, 진실이란 애초에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데다, 인간의 사회성은 공적인 보람과 사적인 삶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만약 실천적인 대화의 장이 검열된다면 사회문화적인 진일보도 없다고 여기는 논자들이 그렇게 판단할지도 모른다. 내 견해에서 그것은 대단히 성마른 주장이다. 그러나 한편 거기서 타당한 측면도 인정해야 한다. 문화권력은 우리 모두가 당장 당면해있고 또 유보할 수 없는 그런 사회적 현실의 중요한 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요점은 이렇다.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한 줌 만큼도 자유롭지 않고, 이념적이거나 직업적인 삶은 결코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유가 아니다. 내면의 중심을 소홀히 하는 것은 진정 존엄한 삶을 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한갓 공상적인 사고나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줏대가 있지만 맹목적인 자기확언을 경계하는 신중함, 영혼의 진정한 성장과 강인함의 씨앗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주축이 되는 명시적 진술들과 저 외부 사건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어떤 값진 성과들을 현실화하곤 한다. 그런데 그것을 수확하는 개인들의 정신적 뿌리를 실제로 들여다보면 놀랄 정도로 막연하고 핍진한 경우가 많다. 불안케 하는 시간 앞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외적 조건에 전적으로 내맡겨버린 삶은 무보증으로 발행된 그 약속어음에 대해 오롯이 자신의 삶을 값으로 지불하게 된다. 욕망을 부추기는 대상이나 담론들이 마음의 운명을 다루는 문제에서 완전히 무능하다는 냉혹한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취약한 마음은 마치 면역력이 낮은 숙주처럼, 언제든 스스로를 문화권력의 소모품으로 내몰 수 있는 그런 ‘감염’의 위험에 처해 있는 셈이다. 갈증과 불안은 좀처럼 해갈되지 않는다. 그리고 베일에 싸인 내면의 소망을 일깨워 그것의 미래를 열어젖힐 존재는 오직 자기자신뿐이다.

   어쩌면 내가 작동하는 상황들에 대해 그다지 실질적이지 못한 전망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고작 마음이나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로 직접적 현실의 주요 동기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가? 세상에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자기 일에 대한 당당한 열정과 가치관의 확신, 또 건전한 신념과 생산적인 야망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사실 이 책의 몇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의문들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영혼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저 타자들의 마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가진 무지(無知), 그리고 우리의 가치판단에서 발생하는 어떤 이분법적인 사고의 강을 반드시 건너가야 한다. 가령 세상은 문제없이 돌아가는데 마치 나만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에 시달린다든지, 어떤 타자들을 단지 한심하고 불쾌한 덩어리처럼 단순하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경험들에 대해 쉽게 무용하거나 저급하다고 판정하는 습관이 있다면 그의 마음은 매우 취약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그렇지 못할 때, 채워 넣어야 할 마음이 비어있을 때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사용할까. 우리가 안정된 삶의 상태에 관한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나와 내가 보는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즉 안과 밖을 연결해야 하고, 바깥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감을 지속적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려면 안과 밖을 이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간식이나 장난감이 저 까마득한 3층 높이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본다. 아이가 자신이라고 하는 내부를, 그가 바라는 저 외부(간식과 장난감)와 연결시키고자 할 때 필요한 ‘어떤 것’이란 물론 부모일 것이다. 아이들은 통상 울음소리나 애교, 간단한 언어적 제스쳐 등 온갖 것을 총동원해 부모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심지어 부모의 관심을 얻거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통이나 짜증을 연기하는 경우도 숱하게 목격된다. 부모가 없다면 아이는 시간을 전혀 제어하거나 감내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포유류적인 감정적 유대의 충족은 물론이고 식사, 배변, 이동, 고통 등 어떤 것도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통제감을 강화하는 차원에서는 아이는 반드시 안과 밖의 중심점을 내부쪽으로 더욱 끌어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기만 해도 부모가 즉각 안절부절 못한다면, 아이의 행동은 저 외부 세계에 대해 점차 심리적 안정과 일종의 특권적인 통제감을 학습하게 된다. 반대로 무심한 부모에게 길러진다면 아이는 당연히 더 많은 불안을 감내하는 가운데 행동화 학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두 팔을 뻗거나 떼를 써도 좀처럼 장난감을 내려주지 않으므로, 나는 그것을 포기하거나 혹은 다른 독립적인 방법을 찾아 우회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호작용 과정은 훗날 내부적인 대응을 통해 바깥의 문제(시간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행동 양식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미래적인 욕구의 해소 여부가 아이 내부의 의도나 행동에 의해서는 전혀 예측될 수 없고 단지 헛돌 뿐이라면, 나는 저 세계 그리고 타인들 앞에서 쩔쩔맬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충족하고자 하는 바를 그들이 우연히라도 해결해줄지, 혹은 아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면화된 조건 위에서 시간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이 예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반복되어야만 아이는 비로소 심리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그렇다고 내가 일종의 유년기 결정론 따위를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급적이면 복잡한 얘기는 줄이고 싶지만, 이제 앞에서 든 예시를 조금만 더 일반화해보자. 시계라는 기술의 상용화는 사회적 협업이나 커뮤니케이션 형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가 시간 약속에 민감한 까닭은, 디지털화된 시계가 우리가 낯선 세계와 만나고 또 관계하는 방식을 내부적으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수용되고 내면화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마음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저 ‘어떤 것’의 자리에 무엇이든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기술적 도구나 장치들, 언어와 책, 가족끼리 정한 규칙, 교통법규, 자본, 행정 및 사법적 체계, 종교적인 설명, 학문적 지식 등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그것들을 미디어나 상징, 담론, 체계 등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가 시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앞서 아이에게 부모가 하는 역할에서 보았듯, ‘어떤 것’은 때때로 목적적이고 때로는 수단적이다. 물론 하나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개인마다 편차가 있다. 대단히 애국주의적인 로마 시민에게는 로마법이 수단은 물론이고 목적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독자나 나 같은 이방인은 단지 로마 생활에 적응하고 또 그들을 존중하려는 차원에서 로마법을 수단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무한정 증식할 수 있는 예시들 때문에 혼란을 겪을 독자를 위해 개념을 하나 빌리자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작동방식을 투사(projection)와 내사(introjection)라는 용어로 통칭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범죄자나 문화규범을 우습게 아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거나 멸시적인 믿음을 갖는 것은 투사이다. 한편 이들을 처벌한다든지 혹은 추방(시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로마법(‘어떤 것’)을 내면화하는 현상은 내사 기제에 해당한다. 물론 이 책의 독자들은 내가 정신의학적 접근의 한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편의상 저 용어의 사용이 지탱해주는 통찰력을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외부상황(‘시간’)에 대한 통제감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안과 밖의 중심점을 내부 쪽으로 끌어당긴다(내사한다)는 진리를 누차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따금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다. 내사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지켜내거나 혹은 세상과 싸워낼 수 있는 그런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마치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두발자전거처럼, 그것은 임시적인 안정과 균형을 되찾아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확히 바로 그런 방식 속에서 기약 없이 마음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취약한 마음이 섣불리 내사한 태도 또는 관점들은 언제나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를 저 텅 빈 욕망, 자기자신을 덧없이 구속하는 그런 고단한 삶으로 향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딴 인간 그리고 실낙원의 우화는 우리 마음의 여정에서 《내사 기제》의 득과 실을 선명히 예견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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