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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Jul 30.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5>

2장. 멈추지 않는 현실에서 깨어나라

(1)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니가 원하는 게 뭔데?’ 혼자 거울을 보면서 묻는대도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리라. 현실에 속한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믿고 조금씩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을 재촉하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광원을 향해 고개를 뻗는 일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는 해바라기처럼, 사람들은 오늘도 저 양지바른 사회적 삶의 시간을 따라붙는다. 어쩌면 평범하게 역할하며 사는 것만큼 박수받아 마땅한 일도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지탱해야 할 생은 이미 그 자체로 고되고 또 무겁다.

   하지만 왜? 언제까지? 우리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뒤쫓는다. 사실 삶이 특별한 축제이기를 바라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마치 아이들이 게임과 역할놀이를 통해 하나의 우주적 순환을 체험하듯, 사람들은 무기력한 일상의 부속품이 아닌 각별한 전체로서 세상에 관여하는 그런 충만함을 꿈꾼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예능이나 스포츠는 물론이고 가족사나 정치적 화젯거리들, 지적인 교양과 종교적인 신앙, 비즈니스의 확장이나 부자가 되는 꿈, 소비적인 여가생활과 낯선 액티비티, 그리고 매혹적인 성애와 사랑이 주는 유희를 구하는 것이다(글쓰는 즐거움도 물론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때 일어나는 강력한 자기동일시는 삶에 일시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또 우리를 숨 쉬게 한다. 통상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의미있고 또 조금씩이나마 전진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의 축적과 개선을 내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목마름이 거의 일생 동안 근원적으로 해갈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잃어버린 마음을 그저 묻어두고 또 회피하면서 현실을 이어갈 때, 우리는 한낱 삶의 우연을 나와 타인의 필연으로 믿어버리는 숙명에 처한다. 마음에서 어떤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면의 관점에서 볼 때 우연성의 본질은, 당사자가 소유한 것이 사라지거나 무너지면 그는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점에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이성을 끌어들이는 외형적 매력, SNS에 게시된 쇼윈도 행복 및 근황, 정치적 진영과 관련한 의기양양한 입장, 가족 구성원이나 종교 및 성 정체성과 관련해 내사한 역할, 유무형의 자본과 재산, 사회적 권위나 실용성이 있는 직업, 점괘나 심리 테스트 그리고 가상 공간에서의 역할 정체성 따위가 모여서 ‘나’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벌거벗은 마음을 대신해 나의 존재 의미를 지탱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증발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나의 신념이나 지적인 해석이 그저 형편없는 오답이거나 또는 편협하게 짜깁기된 진실로 판명된다면, 혹은 내가 가진 유명세나 외적 아름다움이 모조리 파괴된다면, 또 거품과도 같은 재화나 사회적 평가가 아니라 이 순간 헐벗은 내면의 본모습 자체로 내 가치를 저울질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런 권력적 수단 없이도 진정 밑바닥부터 인간관계를 다시 배울 수 있겠는지 상상해보라. 만약 상상하는 것조차 거부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는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우연의 쳇바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평균 이상의 나르시시즘을 앓는 사람이 남몰래 겪는 고통과 우울의 대부분은, 그가 특권적이고 또 주인공적인 인물처럼 기대하는 ‘나’의 가치가 실은 덧없이 평범하다는 점을 이미 마음이 알고 있다는 데서 온다. 기초공사가 부실한 마음은 오히려 급조된 어떤 것을 그 위에 덧칠해 가려버림으로써 예정된 ‘추락’을 유예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주제 넘게 믿고 말하면서 스스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어······. 나는 막다른 길일 뿐이야!’ 그 같은 폐허에 직면하는 것이 두려울 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효력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그것도 대단히 성실하고 지능적으로) 재확인한다. 어쩌면 이런 마음을 비웃고 싶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적인 역할에 따른 효능감 그리고 입맛에 따라 학습한 ‘상식’ 내지 삶의 ‘보편적 의미’를 즉각 자기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면, 실제로 나르시시즘적 말하기에서 자유로운 현대인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같은 욕망 혹은 불안이라는 추동력 없이는 뚜렷한 방향으로 삶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즉 마음은 단지 외부에서 선별되고 또 편집, 조작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세상과 타인에 대해 발휘하는 영향력을 곧 우리 자신(내부적인 것)의 진실과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버린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피스트(sophist)들이나 주장할 법한 그런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만의 운명, 아직 되찾지 못한 그런 필연성이 잠들어 있다. 우리의 욕망은 종종 “나답게 살 거야!”라고 외치면서도 한갓 우연한 사건들을 잡아 끄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선별 작업의 고유한 배열과 양상은 한 개인의 유일무이한 비밀 암시해준다. 성장해가는 삶의 궤적들은 언제나 거꾸로 선 진실의 외양을 띤다. 어떤 서사나 플롯을 통한 표현이 갖는 분명한 한계는, 그것이 지나치게 말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 삶의 진실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름 있는 강단에서 말을 쏟아내는 ‘마음 전문가’들 중 타인의 살아있는 중심을 깊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애초에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고 봐야 하는 경우도 잦다. 즉 내가 타인의 마음으로 향하는 게 아닌, 타인을 내가 선호하는 주제나 지혜로 끌어와 설득하고 싶어하는 사례가 그것이다. 이런 멘토들은 마침 자신의 삶에 잘 들어맞았던 성장의 일부 동기들을 마치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필연적 절차인 양 전도하려고 애쓴다. 지푸라기라도 간절한 삶의 수재민들은 당연히 그런 권위적인 말하기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거의 명품 의류처럼 각광 받는 가르침들을 이리저리 입어보지만, 좀처럼 그것들은 우리의 개성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꼭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은 방황한다. 세상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믿을 것인가? 그러나 어느 쪽이든 깊은 내면으로 난 길을 찾는 데 실패한 자기확언이란 막다른 길이기에, 충분한 이목을 끌지 못하거나 물질적 성과가 미흡하면 그는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빈손으로 돌아간 곳에는 척박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왜 이런 공허한 욕망의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는 걸까. 실제로는 뿌리가 얕고 모순된 마음이 마치 아무런 모순도 없는 양 행세하고, 다른 순진한 사람들의 내적 모순은 그런 말들의 액면가를 또다시 쉽게 믿어버리고 마는 그런 일 말이다. 일단 마음의 모순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부터 짚어보자. 그것은 인간이 자기자신의 텅 빈 마음을(그리고 그것이 주는 암묵적 고통을) 어떻게든 앞지르려는 본성을 가졌기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이다. 가령 쾌활한 얼굴로 유머를 던지지만, 실제로는 기분이 괜찮지 않은 것. 나를 좀 알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 자신 있는 척 당당히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초조하고 불안한 것. 타인에게 선량하고 온전한 이미지로 비치길 바라지만, 내막은 거의 그렇지 못한 것. 상황에 따른 예시는 물론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어쨌든 이 같은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그때그때 뒤바뀔 수 있는 말과 관점이 바로 모순의 심장인 것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모순들의 독특한 일관성은 이미 그 자체가 잃어버린 필연성을 가리켜 보이는 일종의 구조 요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안팎의 사태를 둘러싼 자기 내면의 부조화를 뼈저리게 알고 있다. 반면 명시적이고 각성된 자아(‘나’)는 대개 그것을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앞서 나르시시즘에 관한 설명에서도 살짝 암시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특히 사회적 관계에 노출되어 있을 때) 자기를 앞지른 채 한계까지 버티는 경향이 있다. 즉, 내부적인 실상을 바깥 상황에 억지로 끌어다 맞추는 차원에서 고유한 마음의 습관들이 작용한다. 급격한 피로나 번아웃 증후군, 공황 장애, 신체화 증상, 분출하는 분노나 자살충동 같은 현대인의 친숙한 증상명 역시 이 같은 내부적 수축과 압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일상적인 자기억압은 물론 불안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 과거의 트라우마나 타인에게(혹은 ‘구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텅 빈 욕망이라는 마음의 차원에서 보면 사실 그 억압은 ‘자유롭게’, 그리고 ‘주체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독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주체적으로’ 분투하던 그 존재는 분명 고유한 특색을 가진 ‘나’였지만, 이제는 또 그것이 내가 아니었다니! 하지만 반복되는 마음의 바로 이 좌표야말로 우리 삶을 목마른 방랑자로 영원히 떠돌게끔 만드는 격전지다. 바로 그 균열점에서 가족, 친구, 동료, 연인에게조차 꺼내놓지 못한 희미한 내면의 빛이 새어 나온다.

   헤쳐나가야 할 현실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종종 지쳐버린다. ‘오늘 하루는 특히 나빴어. 아무렇게나 쉬고, 놀고, 푹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유폐된 내면을, 영혼이 남몰래 느끼는 세상을 쓰다듬어 주러 오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나로 인해 방치되고 있는 한 우리는 영영 혼자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와 함께여도, 당신은 외롭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일 아침이 오더라도 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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