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폐허 위에 짓는 마음
(3) 길잃은 사유, 그리고 두 갈래로 난 길
어쩌면 어떤 독자들은 ‘그래서 대체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건지’ 물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필자가 앞에서는 “하이데거 vs. 실존주의자들”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놓고는, 일방적으로 하이데거의 편을 들었다가도 재차 실존주의자의 말을 긍정하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견해를 정리하면 이렇다. 마음에 관한 그들의 지혜는 적어도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지혜는 불온전하며 또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두드러지는 동향과 관련해서는 필자가 주로 다음의 세 측면에 비판적이라는 점을 미리 짚어둔다. 즉 타인의 삶과 정치체를 균형 있게 조율하는 구축론에 무관심한 충동적 해체주의, 답정너 이념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할 ‘뒷일’에 대한 현실적인 예견 자체를 외면하는 유토피아적 ‘계몽주의’, 자기중심적인 취향과 이념적 해석을 세계 및 타자의 현실에 대리 투사하는 무례한 교조주의가 그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이 가진 최악의 단점은, 그가 시간이라는 저 ‘바깥’을 맞닥뜨리고 또 언젠가는 그리로 나아가야 할 마음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깊은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등을 떠밀어서 강제로 헤엄치도록 물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평생 임기응변과 변명에 급급한 그런 소인배(小人輩)의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텅 비지 않은’ 우리 마음의 진실을 마주한 채 ‘바깥’에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이때 엄습하는 양심과 불안을 망각하지 않고 끌어안는 마음의 태도를 ‘결단성(Entschlossenheit)’이라고 부른다. 즉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으려면 아전인수식 이념과 권력(현실화 방법)으로 짜인 내면의 매듭, 곧 마음의 《밝은 방》을 열어젖히고 스스로를 ‘바깥’에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존주의자들이 이런 생각에 반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라캉은 ‘마음의 병은 내면의 매듭이 느슨해질 때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들뢰즈는 즉 현실화 방법(수단)이라는 ‘가면’ 내지 ‘옷 입은 마음’ 너머에는 아무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는 ‘마음의 진리란 각자가 일상적이고 또 낯선 삶을 긍정하면서 사는 데 있지, 대인배(大人輩) 혹은 선한 목자라는 부자연스런 과제를 삶 위에 끼얹는 데 있지 않다’고 항변했다.
우리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들의 철학에서 타인의 마음에 관한 폭력적 이념, 그리고 지독한 아집을 본다. ‘바깥’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하이데거는 자기가 잘 모르는 타인의 손목을 움켜쥔 채 그를 공기가 희박한 행성으로 잡아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사태를 삶의 종점으로 믿는 실존주의자는 타인이라는 ‘바깥’에 대한 침략과 정신승리를 ‘자유’와 ‘민주성’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오늘날 이들의 영향력이 현대적 철학 패러다임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 우리에게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잃어버린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진단할 때 우리의 ‘주체적 결심’ 따위로 실질적인 마음의 치유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깊이 뿌리내린 불행과 그 습관이 그저 그러한 사실만 알아차린다고 개선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했으리라. 그러나 실상은 당장 급한 불을 껐을 뿐이다. 근본적인 차도가 없는 삶은 결국 실현 불가능한 이념에 찬동해 줄 무대와 숙주를 찾아 떠돌아다닐 뿐이며, 그 사이 마음을 갉아먹는 사회적 고립감은 덧없는 고독을 점점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좀처럼 손에 닿지 않는 회복을 도모하려면 ‘바깥’의 미래를 향해 불안정하게, 그리고 아주 집요하게 수축된 마음의 매듭을 이완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이완은 자기 마음의 내부나 ‘바깥’에서 억지로 힘을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과 화해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나아가 시간과의 화해란 우리가 아주 깊고 느릿한 휴식, 영혼이 바라는 가장 근원적인 격정과 안심(安心)의 충족, 습성화된 스케줄 리듬 및 행동 반경의 의식적인 개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관계망의 조정, 또 진정성 있는 자기효능의 회복 등을 총체적으로 도모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앞서 이 같은 치유의 핵이 될 수 있는 과제로 타율적 경험(사랑)과 자율적 경험(예술)의 필요성을 짧게 언급했다. 사실 몇몇 독자들에게는 이 추상적인 단어들이 어색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본능이므로 지레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혹여 지금은 그것이 아주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다 해도, 회복이 일어나면서 아마 그것은 독자에게 고유한 모양으로 조금씩 되살아날 것이다. 다만 독자가 덧없이 길을 헤매지 않게 하려면 필자가 이미 반복해 사용한 ‘시간’, 그리고 ‘안과 밖’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더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우리 마음의 바깥에서 안으로 오는 것인 한편, 예술은 우리 안에서 바깥으로 가는 것이다. 영혼의 수복을 돕는 두 힘은 서로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또 받으면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사실 나는 그것들 중 어느 한 축이 약할 때 서로의 정신적 뿌리도 약화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저 밖에서 오는 것과의 교감을 위해 스스로 ‘나다움’과 그 이념적 습성을 제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반면, 안에서 나가는 것과의 교감에서는 자아(‘나’)가 완전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텅 빈 마음’의 불안한 충동 및 둔감성은 항상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자기 영혼에 더 풍요롭게 주어지는 보상을 확인하는 ‘마음의 문턱값’에 이르면 심적 동기는 전환된다. 실제로 계속되는 인고의 과정에서 체화되는 존엄성의 회복은 결코 이념적 권력으로 소유된 타인, 혹은 내면에서 실행과 해석이 모두 종결된 그런 예술작품 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그 같은 일련의 시도에서 고취된 ‘자신감’은 여전히 우연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아지지 않은 마음의 불안과 허기는 이미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