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2>
2장. 땅거미 질 무렵
(2) 숭고의 그림자
이 책이 종교적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다시 우리의 주제로 옮겨 가 보자. 칸트가 두려워했던 마음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언뜻 보면 그는 마음의 ‘바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칸트가 단 한 번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어떤 경계, 즉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다. 칸트의 상대적인 시간(주관적인 마음)은 그가 ‘심연’이라고 부르는 저 절대적인 시간을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삶과 예술의 보편적 의미에 관한 그의 이념은 처음부터 우리 마음의 어떤 ‘교화’ 내지 ‘정화’를 목적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계심 많은 목적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catarsis) 개념을 철저히 오마주하고 있으며, 그 계몽적 정신은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철학자 플라톤의 영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칸트는 다른 현대적 계몽주의자들(실존주의자들)이 제기한 윤리적이고 삶철학적인 관점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마음의 ‘내부’에서 아름다운 취미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유미주의(aestheticism), 그리고 감정적 충동을 절제하는 평온함이나 ‘선한 의지’의 도덕성을 너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 ‘바깥’의 절대적인 시간을 자기 내면의 상대적인 시간과 철저히 분리시키는 한편 '바깥'에서 ‘혐오스러운 환상’, 혹은 단지 텅 빈 어떤 자유만을 보고자 한다는 성향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즉 계몽주의자들에게 ‘교화’는 저 마음의 깊은 어둠을 탐사하고 또 그것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처럼 유예된 마음의 필연성을 ‘처음부터 없었다’고 설교하고, 저 ‘바깥’의 타인이 너무 떠들어대지는 못하도록 감금하고, 또 만약 가능하다면 잘라내거나 파괴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 질베르 뒤랑은 이처럼 마음이 절대적인 시간이 주는 고통에 대해 스스로를 분리(분열)시킴으로써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충동, 그리고 그와 함께 저 ‘바깥’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결벽증적인 투사(projection) 구도를 ‘이미지의 낮의 체제’라고 불렀다.
이로써 독자들은 ‘마음의 《밝은 방》’이라는 필자의 표현이 어디서 영감을 얻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셈이다. 절대적인 시간 앞에서 지나치게 수축된 마음은 안전하게 폐쇄된 곳에서 안전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불안하고 또 각성된 마음은 늘 진실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마음의 진리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맹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로운 빌런’이 된 철학자 니체는 자신이 가졌던 마음 상태를 삶의 보편적인 의미로 선언하고 싶어했다. 니체는 타인의 반응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인지 그는 ‘바깥’을 파괴하면서 안으로만 굽는 자신의 해석에 죄의식이나 자기혐오를 느끼는 것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니체의 책인 《도덕의 계보》에는 '약자가 갖는 원한(ressentiment)’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말뜻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자기 마음의 ‘바깥’에 돌을 던지며 사는 것은 모든 귀족적인('건강한') 삶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돌을 던지지 않거나 혹은 ‘바깥’에 멀뚱히 서 있다가 돌을 맞고 처량한 신세가 된다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다. 우리는 행인, 미노타우로스, 여자 아이를 연민해서는 안 된다. 돌을 맞고 ‘원한’을 갖는 것은 나약한 자들에게나 잘 어울린다. 그러니 모두 나처럼 다 같이 ‘자유로운 빌런’이 되어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도덕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어떤 독자는 ‘엥?’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 같은 니체의 생각은 저 절대적인 시간(‘바깥’)에 대한 ‘진보적인’ 감수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네. 그러지 말고 그냥 살면 안 돼?’ 그러나 앞서 말했듯, 니체의 《밝은 방》은 자신을 괴롭히는 저 ‘바깥’에 대한 자신의 호전적 이념과 그 모순들을 자기자신과 세계에 허용하고 또 관철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신도 이미 타인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결국 ‘바깥’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딜레마는 동시대의 모든 실존주의자가 겪는 순환고리 같은 것이다.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폭력’, ‘최소한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신학’의 재건립에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실제로 신앙에 의한 강제성만이 이 딜레마를 밀어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고통스런 저 ‘바깥’에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의 실체가 놓여있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우리가 찾는 해답이 절대적 시간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 영혼을 기적적으로 들어 올리는 예술의 무덤 역시 그곳이 아니다. 깊은 어둠을 헤치고 나아갈수록 거기에는 오로지 고통스런 환상과 의심들, 탈수증상을 앓는 페티시즘과 가학-피학적 욕망, 파괴적인 탈주 충동과 중얼거림, 그리고 덧없는 죽음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 전체가 ‘우회’해 돌아가고,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이미 몸담고 있는 밤의 희노애락을 몇몇 예술가들을 빌려 통과할 것이다. 이는 마음 내부의 상대성이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기에 앞서 수행되는 일종의 선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밤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희미한 새벽빛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책의 2부를 시작하면서 고백했듯이 과거에서 비롯된 모든 마음의 모양들을 일일이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미래적인 방식 안에서, 하나의 영혼이 갖는 도시적인 주행성(晝行性)을 자기 내면의 야행성(夜行性)과 화해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밤의 해안에 기운 내면의 고통은 낮의 시간을 사는 ‘나(자아)’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실은 어두운 방안에서 활동하는 마음 역시 ‘바깥’을 무서워한다. 그곳에는 해갈과 회복을 도모하는 웅크린 마음들이 살고 있다. 단지 그는 모래성처럼 덧없는 자신의 반복을 멈추어 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