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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Aug 23.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14>

2장. 땅거미 질 무렵

(4) 백야행(白夜行)


   밤의 시간은 현실적인 희망의 반복적인 좌절이 주는 고립감, 내면에서 한계에 다다른 이상화된 가치관, 그리고 덧없이 소멸하는 삶의 의미와 더불어 서서히 엄습한다. 그때 ‘바깥’에 관한 무지(無知)로 인해 불안한 사람들은 홀로 남는 시간을 피하려고 무작정 약속을 잡는다든지 혹은 일정을 무기한 배치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 밤을 유예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계속된 소진감과 사회적 일상의 무의미함, 익숙한 불행과 공허한 피로감에 잠식되는 마음은 점점 더 낮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억지로 묶여 있던 마음의 매듭은 느슨해지고, 낮의 소음이 잦아든 밤의 끄트머리는 어느덧 우리 마음의 거점(據點)이 되어 있다. 마치 벌어진 상처를 회복하려고 동굴에 들어간 포유류처럼, 혹은 바닥을 딛고 제대로 솟구치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사지에 힘을 빼는 해안의 표류자처럼 말이다. 물론 그처럼 실존화 되는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누구든 한 번쯤은 밤을 길게 늘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령 성실한 직장인들이 이튿날 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새벽까지 술자리를 지키고, 또 집에 가는 연인을 보내기 싫어서 몇 시간씩 거리를 거닐다 결국 택시로 귀가하는 일도 생기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달빛과 어둠에 휘감긴 모든 마음의 모양들을 남김없이 규명하려는 시도는 아마도 좌초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시간의 탐험자는 마음이 가진 상대성으로 인해 저마다 다른 곳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깊은 밤의 시간 어딘가를 홀로 걷는 일은 곧 미노타우로스가 처했던 미궁 또는 밤바다의 무한 근처를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일과 같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잠들기 직전의 잡념과도 같은 초입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밝은 방》으로 되돌아오지만, 한 번 밤의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간 사람이 대낮의 여러 공론장에 재출현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는 그가 더는 대외적인 일상에 의해서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심하면 마음이 죽어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환멸감으로 닫힌 마음이 스스로 외출을 꺼린다거나 혹은 심한 무기력감, 상실감이나 우울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음은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밤의 시간에 근접한 모든 마음들이 즉각 고독한 영혼의 새벽빛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내면적 감상으로 몰려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는 삶이 아니고, 이미 안으로 굽은 우리가 처한 절대적 시간을 당장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습성화된 삶과 이념적 환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밤의 초입에는 외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리저리 허탕을 치는 마음에는 숱한 부침과 동요들이 생겨난다. 몇몇 독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할 수도 있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일정 수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즉 백야행(白夜行)이 초행길인 마음은 절대적 시간이 새겨넣은 상처를 완곡하게 만들고 또 통제감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유희와 상상력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따금 아주 잔혹하거나 음습한 것에 관한 취향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 순간이란 때로는 공포나 초조함을 느끼면서 흔들리는 것이기도 하고, 때때로 불안한 각성으로 인해 끝까지 밤을 새우다 지쳐 잠드는 새벽이 있으며, 모든 고통의 망각으로 이끄는 그런 평온한 죽음을 갈망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과 관련한 덧없는 잡담을 주고 받거나 혹은 세상을 험담하면서 밤의 시간을 채운다. 소설이나 게임, 넷플릭스 등 위무적인 콘텐츠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다. 밤에 숨은 마음의 결여는 다른 허기진 마음에 대한 에로틱한 유혹이나 지배를 탐닉하기도 하고, 밤 풍경을 주시하는 쓸쓸한 우수 속에서 가없는 아늑함에 머무르기도 한다. 경계심이 강한 마음이라면 종종 문을 걸어닫은 채 컬트적이고 심미적인 숭배에 골몰하게 될 수도 있다. 또는 폭식 직후의 공허와 거식증을 부르는 그런 신체적인 갈망을 충족한다든지, 혹은 그저 모든 것을 거부하고 홀로 어두운 바에 앉아 있거나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의 붉은 실은 시간과의 근본적인 화해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맬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보내는 밤의 시간이 턱없이 짧고 또 낮의 관성적 의식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의 욕망은 어떤 면에서 여전히 과거의 숙명에 묶여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마음의 병리적 증상에 관한 인과론적인 추정, 즉 상담가가 내담자(밤의 시간)와 관련해 취하는 과거적 접근은 상담가의 《밝은 방》이 지니는 편집증 내지 시간적 집착과 혼동되는 경우가 매우 잦다는 사실이다. 번뇌에 대한 염려나 불감증 안에서 추정값을 얻는 낮의 체제식 이해는 대개 나머지 없이 꼭 떨어지는 진단 및 처방의 가학적 연산이기 쉽다. 그래서 경험 많은 상담가들은 지독한 우울과 예술적 창조성에 대한 염원이 같이 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같은 병렬적 진행의 의미를 과거 사건과의 상징적 연계 및 해방 외에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당혹스러워 한다.

   예술적인 동기의 순수성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이 앓게 되는 병리적 증상과 완전히 별도의 것이라는 미리 강조될 필요가 있다. 만약 현대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있다면 밤의 ‘밑바닥’에서 마음이 찾고자 하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즉 외부의 덧없고 어리석은 소음을 침묵시킨 그 시어들이, 익숙한 불행으로 식어가는 마음을 소생시키고 또 스스로의 힘으로 말하기 위해 어떤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우선 이 책의 2부에서 우리는 두려운 밤과 싸우는 영혼들, 그리고 여성적인 이미지나 모성적인 환대의 완곡함으로 하강하는 영혼들의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어려서 고통을 받은 아이들에게 미술치료 상담가가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종종 아주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려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위험한 신호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음의 내부(상대적 시간)를 잠식한 ‘바깥(절대적 시간)’에 대해 자율성을 회복해가는 긍정적인 과정이다.

   최근 도심에서 급증하고 있는 증오 범죄의 가해자들은 이 같은 완곡한 치유 과정과 반대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밤의 시간에 대한 불안과 분노에 시달리는 《밝은 방》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차원에서 타인을 폄하 및 공격대상으로 삼기 쉽다. 이를테면 심리적으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가해자의 마음은 진딧물에게 불안의 상징성을 부여한 뒤, 그것을 파괴 및 지배하는 환상을 갖거나 혹은 실제로 파괴를 감행함으로써 자신을 불안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마음의 《밝은 방》, 혹은 낮의 체제가 가진 성격에 대해 다시 한번 교통정리를 해보자. 필자는 1부와 2부 전반에서 그 용어를 일관된 의미로 사용했다. 우선 그것은 마음 내부의 상대적인 시간으로부터 저 ‘바깥’의 절대적인 시간을 확연히 분리시키는 안정화 작용이다. 그리고 그 같은 이원화 구도는 마음에 일시적 안정과 균형을 가져오지만, 그와 동시에 통제되어야 할 ‘바깥’에 대한 맹점을 낳게 된다. 따라서 불안이나 염려, 욕망과 같은 마음의 번뇌에 대해 온전한 통제감을 얻으려면 우리가 ‘바깥’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외부의 문제를 마음 내부로 끌어당기기 위해 우리는 여러 유효한 권력들을 수용한다(내사한다). 각종 습관이나 자본, 기술적 도구나 지식담론, 외모나 명예 등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사실 ‘바깥’의 대상을 선택적으로 소유 및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절대적 시간을 소유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텅 빈 불안이라는 형태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포획되지 않는 시간에 계속 집착하고, 자기가 상상한 ‘바깥’의 시선과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검열하며, 필요에 따라 ‘바깥’을 혐오 및 절개하고, 그럼에도 둘 사이의 유기적 연결성을 확인받으려는 시도를 반복하게 된다.

   이처럼 마음의 《밝은 방》이 편집적으로 벌이는 싸움은 일종의 무기를 든 상상적 전쟁과 같다. 즉, 그것은 앞서 밝혔다시피 ‘진딧물-바깥-절대적 시간’의 자율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려는 그런 이념적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번뇌를 앓는 마음의 《밝은 방》이 이미 밤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개미가 진딧물을 마음대로 제어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는 것은, 거꾸로 그가 자신이 통제당하는 감각을 스스로 ‘바깥’에 넘겨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취약한 마음 내부에 이미 침입한 ‘어두운 시선’을 조절하려면 그처럼 상상된 시선의 포커스를 계속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때 우리는 부질없이 연극하고, 권위적인 말하기에 몸을 숨기고, 딴청을 피우고, 지엽적인 것에 이목을 넘기고, 판을 아예 엎어버리고, 허풍을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마음이 진딧물에 대해 일방적 통제권을 되찾고자 취하는 일종의 군사적 무장(武裝)인 셈이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이처럼 《밝은 방》에서는 무기 그 자체가 이념적 나르시시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그 얼굴, 그 시선을, 말하자면 유혹의 모든 도구를 준비하고 갈고 닦는다. 거울은 공격적인 사랑의 전쟁놀이다.”

   반면 밤의 시간에 점점 더 근접하는 마음의 사투에는 무기나 가면이 쥐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앞서 공포스러운 그림을 그려낸 아이들의 미술치료 사례를 떠올려보자. 밤의 시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마음은 그 실존적 불안을 한계까지 억누르거나 혹은 소유적인 전능 환상을 통해 유예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 고통과 두려움을 능동적 이미지로서 상상(투사)하고 또 소화해낸다. 장기적인 삶의 과정에서 점점 더 자율성을 획득해가는 영혼이 망가지지 않으려면 우선 과도해진 불안을 마음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술이 갖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는 이미 마음의 초기 치유 과정에서부터 확고하게 드러난다. 가령 절대적 시간에 대해 사랑의 경험이 제공하는 타율적 안심과는 별개로, 아이가 그린 그림은 마음이 자율적으로 안심하는 방법을 ‘시간적으로’ 알려준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 내부의 시간에서는 아무런 안심도 도모할 수 없는 경우, 텅 빈 마음은 자신의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외부적인 요구들과 이념적 욕망에 내어줄 수밖에 없다.

   절대적 시간과의 화해 및 그로 인한 치유가 상대적인 시간 그 자체에 필연성으로 속해 있지 않다는 점은 이미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의 내부에서 ‘바깥’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가령 동시대의 추상미술과 개념미술, 몇몇 실존주의적인 초현실주의, 리얼리즘과 전위 문학, 퍼포먼스 및 미디어 아트, 무대연극과 조형 및 공간예술에 반영되어 있는 일부 성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스스로를 폐쇄한 마음의 《밝은 방》이 앓게 되는 그런 숙명적 한계와 맹점에 대해 이 책의 1부와 2부 전반에 걸쳐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운 밤을 우회하지 않고 통과하는 까닭은 더 심원한 주제의식, 더 뿌리 깊은 자유의 존엄, 보존되어야 할 더 많은 마음들의 비밀을 근원적으로 탐사하기 위함인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카라바조, 프란시스코 고야, 에드바르 뭉크, 프랜시스 베이컨, 데미안 허스트 등 작가들을 차례대로 언급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들이 천착한 상상력은 칸트의 《밝은 방》이 아름다운 취미와 숭고함을 본 자리에서 불안과 공포, 고통과 추악함, 충동적이고 관능적인 죽음의 욕망을 본다. 표백(漂白)된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이루는 극명한 대조로 인해 불안정한 이들의 작품에서 밤의 경계가 되는 문은 홀연히 열려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마자, 상상된 어둠의 불행은 즉각 《밝은 방》 전체를 검게 물들인다. 반면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명암법(chiaroscuro)에서 밤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부여는 전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거기서 신화적이고 고전적인 명암의 양분은 사라지고, 비교적 깊고 느려진 어둠 속에서 영혼의 자화상은 단념보다는 내밀한 열정을 향해 몰두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2부 예술론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나방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마무리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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