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25>
2장. 사랑에 관하여
(3) 무엇으로 채울까, 이 길고 긴 밤을
나는 서울 삼청동에 있다가 7년 전쯤 사라진 어느 한정식집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 적이 있다. 넓고 활력있는 그곳 홀에서는 사장님과 주방 이모들 그리고 나 같은 서빙 직원들이 친근하게 어울리며 불평 없이 일을 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이미 삶에서 숱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잔뼈가 굵은 가게 사장님은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 아마도 꽤나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장님은 내 몫의 어지간한 일들은 혼자서 익숙하게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믿고 맡겨 주셨다. 한편 그때 내가 맡은 정기적인 일과 중 하나는 1층 안팎과 2층에 놓인 꽃과 식물들의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키가 크고 작은 식물들이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부엽토를 넣은 화분은 개수도 한 두 개가 아니어서, 가게에 하나 있는 물뿌리개에 깨끗한 물을 가득 채워서 몇 번을 오가야 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사장님은 내가 가게 밖에서 대단히 조심해가며 물 주는 것을 보다가 답답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얘네가 물을 얼마나 많이 먹는데! 우리 가게 식물 다 시들어 죽는다, 인제.” 머쓱해진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사장님이 보이는 시범을 지켜보았다. “흙에다 물 줄 땐 있잖아. 요 아래까지 뿌리가 완전히 다 젖어가지고, 물이 뚝뚝뚝 떨어질 때까지 줘야된단다. 사람이랑 똑같다.” 사람을 식물에 비유하는 그 말은 내게 어쩐지 사장님이 어린 자녀들을 품어 키웠을 시절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글쎄. 그 정도로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버리지 않을까?’ 받침이 없어 고이지 않고 흘러넘친 물은 차량이 오가는 인도변을 조용히 적셨다. 삐걱거리고 무뚝뚝했던 나의 어리석음이 말 없는 식물의 마음을 다 알 길은 없었으나, 화창했던 그날의 아침 공기는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튿날부터 사장님의 따끔한 조언을 열심히 이행했다.
훗날 나는 사랑에 관한 그 ‘따분한’ 조언이 피상적이거나 경박하기 쉬운 다른 어떤 지론들보다도 마음의 진실을 잘 꿰뚫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령 학창시절 우리에게 비법을 전수하곤 했던 학급 내 사랑의 조언자들이 일시적인 성공을 거뒀던 이유도, 그들이 실제로 멋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사람들의 영혼이 고질적인 가뭄에 허덕여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시시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의 존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타인과의 만남에서 아우라적인 어려움 내지 신선함을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같은 이미지는 대부분 한 꺼풀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마음이 그러한 도달 불가능한 환상을 자꾸 만들어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때 마음은 겁많은 우리 자신의 조작적 정의나 매혹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시간의 절대성에 의해 온전히 채워지고 싶은 것이다. 아직 순진한 10대 학생들에게 연예인의 신비주의나 나르시시즘적 연출이 종교적인 형태로 잘 먹혀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같은 현상은 목마른 만큼 욕망으로 전환되기 마련인 우리 영혼의 탈수 상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 우리의 밤을 달랠까? 우리가 바라던 회복이 바로 그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도 없고, 직접 마주치기 전에는 그것의 정체를 좀처럼 알아볼 수도, 설령 알게 된대도 즉각 우리의 운명이 되어줄 수도 없을 그 같은 우연한 기적을 어떻게 희망할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랑은 마음의 ‘뿌리’를 고이거나 썩게 만들 위험한 덫이자 환상은 아닐까? 아마도 이 같은 근심에 대해 너무 완벽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단정적인 앎과 언명이란 대개, 우리가 어떤 두려운 변화를 막연히 밀어내거나 제어하고자 할 때 습관이 된 강박적 몸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앎과 예지는 종종 우리의 관계 방식에 이로운 능동성을 배양해주곤 한다. 그렇지만 그 같은 앎의 이점은 우리가 미래에 관한 어떤 ‘지푸라기 믿음’에 의해서든 일단 마음을 지탱해야 한다는 한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앎 자체가 사랑의 현상을 본질적으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어떤 마음의 비밀이 잠재적으로 이미 경험을 초월해있다 해도 그것을 경험 안에서 실제로 느껴보기 전에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사랑과 예술이 간직한 비밀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에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드럽게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의 양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미래의 사랑을 단정 짓는 습관에서 늘 어떤 여유분을 남겨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식물에게 준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담는 화분 받침은 원래 거의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식물을 실내에 두고 감상하면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은 종종 물그릇이 갖는 편리함 때문에 이 점을 쉽게 간과한다. 일상적으로 식물의 생장에 가장 좋은 급수 방식은 물고임이 염려되지 않는 환경에서 가랑비에 젖듯이, 그러나 흙 속까지 완전히 스며들어 잔뿌리를 다 적실 정도의 충분한 지속성을 갖고 신선한 물을 주는 것이다. 이때 핵심은 잔여분이 아주 충분한 수분의 공급이 뿌리의 자유로운 호흡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일이다. 이 같은 사랑의 충족 조건은 언뜻 보면 대단찮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식물의 입장에서 괴롭게 방치되는 시간의 사각지대를 방지하려면 실제로는 아주 섬세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예컨대 만약 화분에 물 주는 사람이 편하자고 한꺼번에 물을 쏟아붓는다면 뿌리를 잡아주는 흙이 훼손되어 버리거나, 토양이 단단하게 굳고 흙의 양분만 빠져나가거나, 혹은 축축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뿌리가 썩어버릴 수 있다. 물론 반대로 급수량이 너무 적으면 식물은 얕고 취약한 뿌리를 갖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물을 먹지 못한 식물의 경우, 가급적이면 외부에서 물을 주면 안 되고 내부 뿌리가 직접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끔 배려해주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를 채우는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핵심적인 의미에서 볼 때 상당히 어렵고 희소한 일이다. 사람들이 받기를 희망하는 것은 가령 경제적 지원이나 애정표현을 담보로 우리를 채무자로 만드는 조건부 사랑, 상대방의 입장보다 주는 사람의 마음이 더 편안한 선물이나 배려, 가끔 신경이 쓰일 때마다 몰아 처리하는 어버이 생각, 욕망하는 대상을 ‘가스라이팅’하고 싶어서 한 번에 쏟아붓는 애정, 자기 마음의 미성숙한 관성을 방치하면서도 애착 대상의 미래를 점유하려는 집착, 상대의 마음을 실제로 채워주는 일보다 그런 역할이 주는 자기효능을 즐기는 나르시시즘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관계 안에서 서서히 어긋나고 또 시들어가는 마음은 그 표현들이 결국 우리의 운명에 사랑으로 닿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랑은 상대방의 영혼을 살피는 일을 둔감하게 만드는 환상, 상대의 몸과 마음의 전복이나 꾀하는 전략적 게임, 타인에 대한 간헐적 동정심이나 선민의식 같은 것은 아니다. 꺼진 마음을 되살리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는 사랑’은 언제나 ‘주는 사랑’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타인의 진심에 의해서만 충족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진심이란 우리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기쁨과 안녕을 위해 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가 영혼 내부로부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정한 사랑이 가진 역설은, 현재 우리의 진심만으로는 상대방의 행복에 있어서 전혀 충분하지 않다는 그런 고통을 감내하게 되는 데 있는 듯하다.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일은 모두 중요하다. 거기에는 사랑할 진심을 가져야만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혹은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야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어려운 딜레마가 놓여있다. 채워지고 또 채우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한쪽만이 세심함과 인내심을 일방적으로 기울이는 사랑은 결국 소진되어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사자는 언젠가 유한한 시듦의 한계점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같은 한계를 무한한 소생과 지속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생장시키는 사랑의 상호성 뿐이다. 그러나 한편 사랑하는 능력은 언제나 사랑받는 능력보다 우월하니, 기적과 행운의 여신은 늘 진솔한 용기를 발휘하는 삶의 손을 들어준다. 누군가는 먼저 변화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시작의 힘을 길러나가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리적으로 멀거나 가깝겠으나 사랑에 이르는 거리는 항상 멀고도 멀다. 내 마음의 한계로부터 무한히 뻗어보는 그 잰걸음은 목적지에 앞질러 이를 수 없기에 언제나 한 걸음씩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또 그런 가난을 채워주지 않는 사랑이 우리는 얼마나 야속한가.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사랑에게 얼마나 많은 우리들을 견디게 하였는지, 그 같은 것을 자신의 삶에 주어진 가장 좋은 것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랑은 어떤 사랑일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개인이 가진 부족함을 떠나, 누군가 이 같은 마음을 곱씹고 말해주는 일만으로도 사랑의 식물은 밤의 무한을 견디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그것으로 물과 공기는 충분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울어진 몸과 마음을 하루 더 단정히 하고, 희망하는 기개를 잃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의 잔여분을 꿈꾼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밤의 산책길을 걸으며 나는 당신의 행복한 얼굴을 향해 간다. 다만 그것이 아직은 다 오늘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