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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무스 Oct 22. 2023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30>

에필로그

(3) 권력 투명성과 패배의 기술

(4) 이념 없이 타인을 환대하기


에필로그: 되찾은 미래를 향하여

   이 책의 구성은 저마다의 고유한 삶의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종합적인 관점 하에 시퀀스를 그려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일종의 순차적인 ‘빌드업’을 통해 독자를 이끌지 않으면 내가 준비한 편지의 두께가 현실적으로 독자에게 가닿기 어려우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활용된 개개의 이야기들이 그저 전략적 수단으로서만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악한 시도였겠지만 나는 되도록 배치된 각각의 내용들이 독자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풍부해지는 느낌과 생각들을 잘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마음 일반을 편리한 형태로 접고 또 조립하려 드는, 그러나 실상 자기 편향적이고 실효성도 없는 여러 철학적 해석들을 물리쳐야 했다.

   그런데 읽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그 물리침의 과정에서 분명히 독자 내면의 이념도 일부 제지를 받았을 수 있다. 이는 이념적 욕망 자체가 모든 사람이 거치는 숙명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면에 받아들인 권력과 담론을 토대로 외부 상황에 대한 제어력을 일방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는 단지 몇몇 이론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어떤 설명이 적절했는가를 말하기 위한 기준은 당연히 그것을 언제든 반증할 수 있는 수많은 마음들의 존재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사례 검증에 관한 한 자기 주장의 투명성을 회피하는 이념적 신조들에 대해서는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타인의 마음이란 것이 내 이해와는 다르고, 또 그 깊이나 다양성이 생각보다 더 심오한 것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이념적인 욕망과 의미화를 단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그 같은 여정을 이 책에서 장려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대개 삶에는 그 모든 존엄한 타인들의 현실적 공생 문제를 무겁게 책임지고 논의할 의무도 동기도 속해있지 않지만, 적어도 여러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흔적들을 되짚어보는 과정 자체는 우리에게 마음의 안팎에 대한 나름의 통제감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철학자들의 관념은 세상과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억지 승리를 거두려다 너무 조급하게 사유를 매듭짓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덧없이 불행한 승리의 외침 속에서 뻔한 숙명에 지고 만 것이다.     

(...)     

   설령 나의 삶이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는 결국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줄 수 있는 미래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다만 익숙한 불행의 대를 끊어낼 그 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든든한 지붕이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령 그 과정에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고 또 핍박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희망한 미래라는 코미디에 대해 떠올린다. 삶이라는 무한의 좌표 속에서 내가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는 일. 나를 등지고 돌아선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고 쓸어줄 수 있다는 일. 어긋나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축복해줄 수 있다는 일. 그리고 어딘가로 향해 가는 사람들과 언젠가는 그곳에서 함께 만날 수 있다는 일. 그리하여 우리가 준비되어 있을 수 있다는 그 모든 일들.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농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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