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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22. 2021

Back to the 2015, Brussels

맥주와 와플, 더 이상 뭐가 필요해?

섬나라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입성했다.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s)은 jtbc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 본 이후로 꼭 한 번 와 보고 싶었다.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벨기에 맥주도 워낙 맛있어서 언젠가는 현지에서 맥주를 꼭 먹어봐야지, 다짐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규모도 크지 않고 런던과 독일이 워낙 바쁜 일정이라 중간에 쉬어 가는 의미로 이틀 정도 머물기로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과연 쉬는 일정이긴 했나 싶다.)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라는 (유럽에는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 또 어찌나 많은지) 그랑플라스(Grand Palace)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사방으로 화려한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유럽에서 광장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지루할 틈 없이 사방을 둘러싼 건물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부족함 없는 곳임에는 분명했다.

광장을 둘러싼 화려한 건물들

유럽의 이런 형태의 광장들은 주로 중세시대에 대형 시장이 생기면서 발달했는데 주요 관공서나 길드하우스들이 광장 주변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브뤼셀의 그랑플라스 주변의 화려한 건축물은 시청, 시립 박물관 등 공공 기관과 호텔, 레스토랑으로 활용되고 있다.

찌를 듯이 높은 시청사 탑
석양이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조명이 켜진다



도심 자체가 크지 않고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길을 잃어도 그랑플라스로 다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 작정하고 도시를 헤매기로 했다. 시간이 되면 만화 박물관도 가보려고 했는데 골목마다 이미 작품들이 가득하다. 벽에 그린 낙서들일뿐인데 이렇게 색감이 좋고 난리람?

골목 곳곳에 감각적인 벽화들
여기가 미술관인가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난데없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성당 앞이다.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Cathedral of St. Michael and St. Gudula)은 왕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거행되는 벨기에 국립 성당으로 많은 고딕 양식 성당이 그렇듯이 내부와 외부 모두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닮아 있다.

성당은 어느 도시나 비슷하지만
또 모든 성당이 각기 다르다



아직 날은 밝지만 이제 슬슬 진정한 브뤼셀을 즐기기 위해 맥주를 마실 시간이다. 내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던 바로 그곳, 브뤼셀의 본론은 여기에 있었다.


델리리움 펍(Delirium Café)

2,000 종류가 넘는 맥주를 보유하고 있어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며 맥주가 있더라도 전용잔을 다 사용하면 그 맥주는 팔지 않는다는 곳. 방송에서 보자마자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저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델리리움 펍은 벨기에 음식 전문점으로 한국 관광객에게 유명한 쉐즈 레옹(Chez Leon)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Delirium’이라고 간판을 걸고 있는 펍이 많으니 분홍 코끼리를 꼭 확인하길 바란다. 입구 곳곳에 매달려 있는 분홍 코끼리 간판이 ‘여기까지 와서 맥주도 안 마시고 가면 안되지!’라며 나를 부르는 듯하다. Delirium CAVE라는 지하 바(bar)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왼쪽에 보이는 분홍 코끼리를 찾아가자

Delirium은 벨기에의 유명 브루어리 휘게(Huyghe Brewery)의 맥주 시리즈로, 가장 유명한 ‘델리리움 트레멘스(Delirium Tremens)’ 외에도 현재 총 일곱 종의 맥주가 출시되었다. 처음에 이 맥주 이름을 들었을 때 맥주를 마시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던 생각이 난다. delirium tremens는 알코올 진전 섬망 또는 알코올 금단 섬망이라는 뜻으로 알코올 중독 증상이 있던 사람이 갑자기 술을 끊게 되면 나타나는 떨림, 환각 등의 섬망 증상들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환각을 볼 때까지 마셔보라는 건지, 아니면 술을 끊으면 섬망이 나타날 수 있으니 끊을 생각조차 하지 말고 계속 마시라는 건지, 맥주 이름에 대해 혼자서 재미있는 추측을 했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맥주에 이렇게 자극적이면서 오히려 금주 캠페인에나 어울릴 법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 맥주가 벨지안 골든 스트롱 에일(Belgian Golden Strong Ale)이기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이 스타일의 맥주들은 필스너의 열풍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색은 비슷하지만 필스너와 달리 도수가 높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강하고 자극적인 이름을 쓰곤 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맥주로는 악마라는 뜻의 ‘듀벨(Duvel)’이나 ‘루시퍼(Lucifer)’, 해적을 의미하는 ‘피랏(Piraat)’ 등이 있다.

휘게 브루어리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델리리움 맥주 시리즈

이러나저러나 일단은 맥주를 마셔보자.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먼저 주변을 살폈다. 여행 중에는 무엇이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관찰하고 따라 하면 중간 이상은 간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bar에 와서 주문을 하면서 바로 계산을 하고 기다려서 맥주와 안주를 받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다행히 이미 bar에 앉아 있으니 멀리 왔다 갔다 할 필요는 없었지만 쿵쿵 울리는 음악소리에 바텐더를 부르는 목소리는 묻히기 일쑤이니, 처음에는 바텐더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나를 좀 봐달라고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저 여기 있어요! 여기 좀 봐주세요!

맥주 메뉴판은 100개 정도의 맥주 이름이 적힌, 초심자를 위한 요약정리 버전과 고수들을 위한 백과사전 버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백과사전 버전의 메뉴'책'은 옛날 옛적 전화번호부를 떠올리면 된다. 전화번호 대신 맥주 이름과 알코올 도수(ABV, Alcohol by volume), 가격이 적혀 있다는 것만 다를 뿐. Bar에 있는 맥주 탭만도 20개가 넘는데 멀리 문틈 사이로 보이는 창고에는 맥주가 대체 얼마나 많을까?

수많은 맥주 탭과 기네스 등재 증서(?), 생맥주 메뉴

메뉴판을 한참 들여보다가, 에잇, 하고 던져버렸다. 수많은 맥주 이름이 깨알 같이 적힌 메뉴판을 본다고 모르던 게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일단 벨기에의 대표(?) 맥주인 듀벨(Duvel)을 주문했다. 잘 안다는 듯이 일단 주문해서 마시긴 했는데 이 많은 맥주 중에 또 뭘 마셔야 하나? 여행지에서는 뭔가를 주문하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면 추천을 받는 것이 상책이다. 추천을 받아서 실패한 적은 아직 없다.


맥주를 추천해달라고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질문이 더 많다.

- 병맥주, 생맥주?

- 좋아하는 스타일이 따로 있니?

- 향은 어떤 걸 좋아해?

- 이게 몇 잔 째야?

- 전에 마신 맥주는 뭐였어?

- 앞으로 얼마나 더 마실 거야?


병맥주, 생맥주는 당연히 물어볼 수 있고 스타일이나 향도 그렇다 치지만 나머지 질문은 대체 왜 하나 했는데 계속 마시면서 얘기를 해보니 직전에 마신 맥주의 스타일이나 향, 도수에 따라, 앞으로 계속 마실지 서서히 술자리를 마무리할 지에 따라, 어떤 맥주를 권할지가 달라진단다. 예상치 못하게 전문적이어서 놀랐다. 게다가 워낙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라 나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맥주 한 잔 주문하기도 눈치 보일 줄 알았는데 맥주잔을 씻고 맥주를 따르고 다른 주문을 받는 와중에도 추천해 준 맥주 맛은 어떤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질문도 해 주고 맥주를 마시는 내내 친절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좋은 경험을 만들어 주었다.

듀벨, 그다음은 추천받아 마신 많은 맥주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여기서 여행 경비를 다 탕진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이곳에서 사용할 예산은 이미 정해 놓고 마시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1차 방어벽은 금방 무너졌다. 맛보고 싶은 맥주는 많고 추천해 준 맥주는 또 매번 어찌나 맛있는지! 일부러 가방 깊숙이 넣어둔 유로화 뭉치에 손을 대고 말았으니, 남은 여행을 조금 검소하게 다니면 될 일이 아니겠나. 할머니들이 손주들 용돈 주신다고 바지춤에서 쌈짓돈을 꺼내 듯 주섬주섬 유로화를 꺼낼 수밖에.



그렇게 몇 시간이나 맥주를 마시고 나왔는데도 밖은 어두워질 생각을 않고, 밤이 다가오고 있지만 너무 밝아 숙소에 들어가긴 싫다. 그러고 보니 아직 와플을 못 먹었다. 그랑플라스 바로 옆, 와플로 유명하다는 메종 단도이(Maison Dandoy)를 찾았다.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것 같았던 가게 앞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와플도 그리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와플뿐만 아니라 쿠키도 유명하다고

그래, 와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벨기에라고 뭐 다를 거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먹어는 보자, 하며 생크림을 올린 기본 와플을 먹었는데! 이 맛은? 영국 바스에서 스콘을 먹었을 때 정도의 감동이다. 와, 이래서 사람들이 벨기에 와플, 벨기에 와플 하는구나. 사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이런 ‘겉바속촉’이 제대로 느껴지는 훌륭한 와플집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모처럼 마음을 먹고, 날까지 잡아야 먹을 수 있는 디저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게다가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으니까) 여행 중 먹은 그 와플의 맛이 더 특별하고 감동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평범해 보이지만 맛은 특별했던 벨기에 와플



6년이 흐른 지금,

똑같은 곳에 가서 똑같은 것을 먹는다 한들 그때만큼의 맛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정말 확신할 수 없다.

그 시간 동안 그곳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으므로.

같은 곳을 가더라도 매번 다른 경험이 되는 것이 또한 여행의 매력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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