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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Chae Jan 21. 2021

Back to the 2015, Bath

화려한 온천 도시 바스

런던 일정 중 다녀올 근교 도시 중 한 곳이 옥스포드였고 나머지 한 곳이 오늘 소개할 이곳 바스(Bath)이다. (영어 철자가 왠지 익숙하다면, 그렇다. bathroom의 그 bath가 맞다.)


도시 선정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는데 인상 깊게 본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이 고뇌하다가 자살을 선택하는 장면의 배경이 바스의 에이번강(River Avon)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전체, 모든 배우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유난히 그 장면이 압도적이었고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았다. 마침 런던에서 대중교통으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고 도시 자체도 반나절이면 충분히 볼 수 있다고 하니 당일 치기 근교 도시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로만 바스(Roman bath)와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 유명한 도시로 떠나자.



런던에서 9시에 출발해서 11시 반쯤 도착, 작은 동네이니 여유 있게 둘러보고 15시 반 버스로 런던으로 돌아오는 훌륭한 계획이었다. 버스 티켓도 미리 예매하고 결제해 두었으니 준비도 완벽했다. 악명 높은 메가버스의 진가를 겪기 전까지는 그랬다. 역시 여행 일정은 이렇게 꼬여줘야 제 맛이지!


버스터미널에서 메가버스 승차장을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다른 버스 회사 승차장에 서 있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진땀을 흘리며 여기저기 물어서 출발 시간 직전에 겨우 승차장을 찾았다. 무사히 탑승해서 의외로 정시에 화기애애하게 출발하나 싶었던 버스는 터미널을 벗어나자마자 길에 서 버렸다. 버스 기사가 세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버스가 서 버렸다. 결국 버스 회사 사람이 와서 버스를 이리저리 한참 살펴보더니 다시 출발했던 승차장으로 돌아가라는 거다. 그리고 모든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나 오늘 바스 못 가나?


승차장에서 기다리면 대책을 마련해주겠다며 떠난 직원은 보이질 않고 바로 옆 버스 회사 부스에 혼자 앉아 있는 직원은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손 놓고 있지, 이대로 버스 요금은 버스 요금대로 날리고 바스도 못 보고 끝나는 건가, 영어를 못하니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고 망연자실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저 멀리서 직원 한 명이 손에 버스 티켓 뭉치를 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다른 버스 회사 버스에 우리를 태워준다는 것. 한 시간을 터미널에서 허비했지만 그래도 더 좋은 버스로, 어쨌든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대로 못 가게 되었으면 정말 서럽게 울 뻔했다.



시내 중심, 초입에 서 있는 마을 지도

바스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온천이 가장 유명하고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담한 도시지만 로만 바스 박물관(Roman bath museum), 제인 오스틴 센터(Jane Austen centre),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 에이번 강 위의 풀터니 다리(Pulteney bridge)를 포함해서 눈에 담아야 할 곳이 많다.

제인 오스틴 작가님이 반겨주는 이곳


이번 여행을 하며 새롭게 다짐한 것 중 하나가 앞으로는 남들 휴가철, 성수기에는 되도록 여행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난 세 번의 유럽 여행을 모두 비수기 때 해서 잘 몰랐는데 성수기에 여행을 해보니 알겠다. 성수기에는 동네에 그 동네 사람들이 별로 없고 관광객이 훨씬 많다. 그 동네 사람들도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휴가를 떠나버리고 정작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휴가를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여행하면서 현지인을 만나기 기대하는 나에게는 성수기가 오히려 피해야 할 여행 시기가 되어버렸다. 유명 관광지에 가면서 바글바글 사람 많은 건 또 싫고 관광객 주제에 관광객 티 나는 것도 싫은 이 이상한 성격을 어쩌겠어?


메가버스 덕분에 한 시간을 허비했으니 예상보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로열 크레센트 앞 잔디밭에 앉아서 여유 있게 빵을 뜯고 싶었던 나는 본격적인 마을 탐방을 시작하기 전에 중심가 빵집에서 허름해 보이는 샌드위치와 싸구려 스콘을 사서 가방에 챙겼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빵 두 조각이 나중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시내 중심부를 관통해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거대한 잔디밭을 마당 삼아 우뚝 서 있는 초승달 모양의 길쭉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는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 높이에, 길이 180m에 달하는 다세대 주택으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크레센트(초승달 모양의 광장 혹은 거리)로 손꼽히며 테라스로 지어진 최초의 예로 알려져 있다. 건축 재료로는 희미한 금빛의 바스 석회암을 사용하였으며, 30채의 집이 완전한 반타원형을 이루어 맨 끝에 있는 집들은 서로를 마주 보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저, 마로니에북스 참고)

이미지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1/Royal.crescent.aerial.bath.arp.jpg

이런 건축 구조가 실용적으로는 어떤 이점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내가 보기에는 건물이 참 아름다웠다.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경관도 좋고 건물 앞 잔디밭까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 넓은 잔디밭을 각 건물의 테라스로 설계했다고 하니 건축가의 상상력이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건축 당시 통일성을 위해 건물의 실내는 장차 입주자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게 했지만, 외관만은 매우 엄격하게 설계를 따르도록 한 덕분에 건물의 파사드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통일성 있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웅장하게 압도하는 건물
현관 앞과 지하 공간까지 개성 있게 꾸며 두었다. 완벽해!


이 웅장한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인 듯, 잔디밭에 앉아 여유 있는 점심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잔디는 어쩐지 축축하여 아쉬운 대로 잔디밭 주변에 말끔히 조성되어 있는 산책길 벤치에 앉았다.

잔디밭 앞에 뜬 초승달 주택

시내 아무 빵집에서 대충 산 빵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는데 어라? 이건 기대 이상이다. 달랑 치즈와 정체불명의 햄만 들어있던 샌드위치도 의아할 정도로 맛있었고 거기에 진짜 놀라운 건 스콘이었다. 아니, 음식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아무런 기대 없이 산 동네 빵집 스콘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제까지 한국에서 먹었던 스콘은 스콘이 아니었던 건가요? 영국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콘을 꼭 먹어 보길 추천한다!

허술해 보였지만 썩 괜찮았던 샌드위치와 문제의 그 스콘



이 정도에서 다시 시내로 내려가기는 좀 아쉽다. 시내 입구에 세워져 있던 마을 지도에서 벗어나 보기로 했다. 마을 꼭대기에 교회 종탑이 보여서 일단 그곳까지 가 보는 걸로 결정! 시내 중심가와 로열 크레센트를 벗어나니 훨씬 한적하고 조용하다. 이제야 진짜 이 동네의 모습을 만난 듯하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한 언덕 위의 조용한 주택가를 여유롭게 거니는 아름다운 그림을 생각했는데 그건 약간의 판단 미스였다. 도로의 경사가 엄청나서 거의 등산 수준이었다는 것만 빼면(!) 고즈넉하니 돌아다니기 좋은 동네였다.

유럽은 어느 도시든 채도가 비슷해서인지 마음이 편안하다
산책이 아니라 등산이네
윗동네 작은 성당과 동네 흔한 대문(?)



마을을 한참 돌아보고 다시 시내 중심가로 내려왔다. 바스에서 로열 크레센트 다음으로 기대하고 있던 풀터니 다리(Pulteney Bridge).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곳은 이 다리 바로 옆이다. 풀터니 다리 양쪽에는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와 마찬가지로 골동품 가게들과 카페들이 들어와 있었다.


영화에서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표현된 운하는 막상 실제로 보니 아담한 느낌이다. 어리석게도 영화에서 본 웅장한 모습을 생각하고 기대했으니 처음에는 약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운하와 그 주변 건물, 풀터니 다리를 꽤 오랫동안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작고 소박한 운하였지만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곳.

상상과는 달랐지만 아름다웠던 에이번 강과 풀터니 다리



유럽 어디에서나 성당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바스 사원(Bath abbey, Abbey Church of Saint Peter and Saint Paul, Bath)을 둘러보았다. 온천이 유명한 도시라서 그런지 제대도 온천수 모양(?)으로 꾸며져 있다. 보통 그 지역을 대표하는 큰 성당(유럽의 거의 모든 성당)에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입구 위쪽에 위치해 있다. 성당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파이프 오르간의 규모도 함께 커지게 마련이며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아주 적어도 1,000개에서 많게는 10,000개 이상)의 파이프가 웅장한 소리로 성당을 가득 채워준다. 그래서 나는 성당을 둘러볼 때 꼭 파이프 오르간을 찍는 습관이 있다. 거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성당 뒷면에서 묵묵히 전례를 풍성하게 해주는 고맙고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성당, 온천수 모양으로 장식된 제대가 인상적이었다



사실 조금 더 빠듯하게 돌아다녔으면 로만 바스 박물관도 대충 훑어볼 수는 있었겠지만 나는 어쩐지 굳이 많이 관심 가지 않는 곳을 출석 체크하듯이 들르기 위해서 정말 보고 싶었던 곳을 여유 있게 둘러보지 못한다면 그게 나중에 더 아쉬울 것 같았다. 로만 바스 박물관은 선물을 사기 위해 기념품점만 잠시 들렀고 나중에 온천을 즐기러 휴양으로 올 때 제대로 둘러보는 것으로 아껴 두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이런 bath, 저런 bath, 명성에 걸맞은 동네 풍경

모두들 들르는 대표적인 여행지를 보지 못한 아쉬움은 돌아와서 온라인으로 달래 보았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ancient-origins.net/sites/default/files/field/image/Aquae-Sulis.jpg
공식 홈페이지(www.romanbaths.co.uk)에서 자세한 안내와 내부를 볼 수 있다






5박 6일이었지만 정작 온전한 시간은 4일이었으니 내셔널 갤러리와 영국박물관을 과감히 생략했는데도 옥스포드와 바스, 근교 도시 두 곳과 런던을 돌아보기엔 역시 빠듯했다.


예전에 갔던 곳은 다시 가서 좋았고 처음은 처음이라 신났던 런던 일정이 끝났다. 볼 때마다 감동적인 타워브리지와 시청, 눈과 입이 즐거웠던 런던의 시장들, 나만 알고 싶은 코톨드 갤러리에, 베이커 스트리트와 애비로드 스튜디오, 템즈 강변에서의 맥주까지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바쁘면서도 여유롭다니. 그렇게 느껴진 건 아마도 이게 여행이기 때문이겠지.


빠듯한 시간과 예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을 다 보지 못했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모든 여행은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고 어쩌면 그런 후회와 아쉬움이 매번 다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빅 벤에 조명이 비추고


흐리고 추운 날씨조차 모든 것이 완벽했던 아름다운 나의 도시 런던, 다음을 기약하며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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