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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l 23. 2024

어떻게든 읽겠다는 의지

책태기를 뚫고 나가려던 기록



책이 안 읽히면 어떻게 할까. 보통은 덮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간단한 원칙을 실천하며 독서생활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정말 읽고 싶다면? 하고 싶은 것이 그것뿐인데도 할 수 없다면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워진다. 독서의 재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처럼 다른 일에는 별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눈을 뜨고 세수를 하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곤 어제 읽다가 만 책을 곧장 펼쳤다. 이런 행위는 기계적일수록 좋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행동할 것. 정말 막바지에 몰렸을 때 내가 자주 택하는 방식이다. 을유문화사의 『워더링 하이츠』를 고른 단순한 이유였다. 고전 소설 내가 현재 가장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전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도통 읽어나가지 못하는 나의 이상상태가 훨씬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전소설을 단번에 이해한 적이 없으므로. 페이지를 혹은 번, 많으면 다섯 넘게도 읽는다. 메모하며 일일이 정리해야 소설 속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려나갈 있다. 기초 공사를 잘해놓아야 깊이 빠져볼 있는 분야인 것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독서하면서 지키기로 한 규칙은 두 가지다. 첫째, 끝까지 읽기.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종이책은 만지지도 사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작품 세계에만 빠져있기 위함이다. 지지난달 말에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이후로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완독 한 일이 없다. 단편 작품 하나를 한 권의 책처럼 오래, 깊이 파고드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두툼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난 후의 만족감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감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음으로는 필사하지 않기. 노트를 펼쳐두고 읽는 족족 베껴 쓰는 것이 나의 오랜 독서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오로지 읽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필사할 부분은 나중을 위해 따로 표시만 해두고 일단 읽어 나간다. 이해를 하긴 해야 하니까 밑줄과 메모는 어쩔 수 없다. 장이 끝날 때마다 요약도 하고 있다. 힌들리의 이름을 열 번을 넘게 쓴 것 같은데 아직도 힌들러라고 쓰는 걸 보면 한참 멀었다. 머리가 더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책은 점점 엉망이 되어가지만, 그럴수록 워더링 하이츠는 내 머릿속에 선명해진다. 오후까지 100쪽을 넘게 읽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안에는 150쪽을 넘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굉장히 희망적인 수치다. 어쩌면 내일까지 이 분위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21년 9월 25일




책태기는 책태기인 줄도 모르게 온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성인이 된 후에야 독서를 시작한 경우여서 읽는 기술이 형편없었다. 본래 잘 못 읽었으니, 책태기가 와서 그런지 원래 내 실력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독서기록을 시작한 후에야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리 어렵고 더디게 읽어도 평균 주기 같은 것이 있으니까.

이 무렵은 책을 읽고 있다는 욕구가 책이 안 읽힌다는 괴로움보다 더 큰 때였다. 지금 못 읽으면 앞으로도 못 읽게 될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매일이 필사적이었다. 여기 이 줄을 넘어가게 해 주세요, 비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워더링 하이츠는 완독하지 못했지만(끝부분이 조금 남았다) 이전처럼 책을 읽고 사는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지만으로 버텨볼 수 있는 일이 있기는 있던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쓰지 않고 읽는 연습을 꽤 오래 했었다. 이전까지의 독서는 학습에 가까웠는데, 그런 방식을 탈피해 보려고 노력했다. 머리가 나빠서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때에 비하자면 지금은 거의 놀면서 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꽉 막힌 벽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냥 평범한 던전이었다. 생각지 못하게 획득한 아이템들이 적지 않아서 괴롭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2024.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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