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시간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는 기분으로
달리기를 못 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무릎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침대 밑으로 발을 뻗었다가 실망하며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고, 하루를 시작할 의욕을 한순간에 잃는다. 도로 침대에 들어가 눕고만 싶다. 아침잠이 부쩍 늘었다. 오후 나절에도 미친 듯이 잠이 쏟아져서 버티지 못하고 잠들 때가 있다. 통증의 정도는 심하지 않다. 조금 불편하고 무거울 뿐인데, 그만한 자극만으로도 패배자의 자세를 취하는 자신의 몸뚱이가 놀라울 뿐이다.
사정을 모르는 가족들은 며칠 만에 포기한 거냐며, 잊을만하면 한 번씩 돌아가며 속을 긁는다. 가족들이 내 사정을 모를 리 없다. 무릎이 아프다는 말을 열두 번도 더했다. 그런데도 오늘은 왜 운동을 하지 않는 거냐고 시간마다 묻는 것을 보면 내 몸뚱이만큼 놀라운 사람들이다. 어제는 잠자코 동거인들의 말을 들어보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이 하는 말은 내가 방금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별 의미 없는 추임새를 두세 번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쑥불쑥 물었다. ‘뭘 그래?’, ‘뭐가 그렇다는 건데?’, ‘그거 지금 내가 방금 한 말이잖아?’ 이쯤 되면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고, 그에 비례하여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극에 달하면 내 안의 언어체계는 멋대로 소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고, 아프다는 얘기는 정말이지 할 필요가 없겠구나, 라며 매우 극단적인 다짐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내가 지겹지만, 솔직히 나는 상대도 지겹다. 점점 더 나눌 말이 없어지는 것 같다.
가난해진 정신 상태로는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 몇 개의 문장을 써놓고 이만큼이라도 했으니 됐다고 자위하는 일도 솔직히 신물이 난다. 그런 식으로 써서 나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썼다. 책을 읽으면 좀 나을까. 독서는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도피처였다. 절반의 확률로 실패할 수 있다는 조건이 따르기는 하지만. 역시 몸을 부리는 쪽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달리기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절주절거리기나 했던 그간의 답들이 이제야 정리되는 것 같다. 나는 전속력으로 뛰고 싶었다. 바람이 피부를 벗기는 감각을 상상하며. 무거운 시간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는 기분으로. 살고 싶었다. 사는 동안은. 건강하게.
2022. 05. 12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건 미친 듯이 내달리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10초나 제대로 뛸까 말까 하는 실력이었지만, 잊을 만하면 총알처럼 튀어나갔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뛰었다. 그 찰나에 느꼈던 해방감이 너무도 짜릿했다. 그 순간을 1초라도 더 늘려보고 싶어서 런데이 어플을 깔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러 나가면 최소 30분 이상은 땀을 흘리다가 들어오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간을 도피처로 쓰기도 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중요한 글이 갑자기 막혀버렸을 때, 기분이 안 좋을 때, 고민이 생길 때, 돈이 없을 때, 아무하고도 말하기 싫을 때, 집이 너무 불편할 때. 다짜고짜 옷을 벗고 러닝복을 챙겨 입었다. 그러곤 나가서 30분이고 60분이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간에 의지해서 지나온 일들이 많았다. 지금도 달리기는 내게 그런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위의 일기는 일도 잘 안 풀리고 감정적인 여유도 없는데 무릎이 아파서 달리기까지 못하게 되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을 때 쓴 글이다. 나라고 달리기를 안 하고 싶은 것이 아닌데, 누구보다도 내가 간절히 그걸 원하고 있는데, 가족들이 자꾸 오늘은 달리기 하러 나가지 않냐고 물으니까 기분이 상했다. 집 밖에서도 이미 했던 말을 자꾸 또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 말을 무시하나? 듣기는 하나? 같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기도 했다. 역시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마음도 다 약해지는 것 같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달릴 수 있는 지금의 자신을 소중히 여기자고 다짐한다. 하나라도 어긋나기 시작하면 나란 인간은 너무도 답이 없어지므로... (2024. 0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