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한 우물만 파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순탄하게 잘 나가다가도 그 길이 정말 맞는지 자꾸 멈춰 서게 된다. 고질적인 불안감 때문일까. 나 자신도 잘 믿지 못하는 나는 계속 이런 모양의 궤적만 그려야 하는 걸까.
웹소설을 쓰겠다고 작정한 후로 웹소설을 많이 읽고 있다. 문체가 뭐가 다르다는 건지, 트렌드가 어쩐다는 건지, 좀처럼 와닿지 않던 얘기들이 작품을 읽으면서야 불쑥불쑥 머릿속에서 튀어 오른다. 거봐 도입부가 죽여줘야 한다고 했잖아. 트렌드라는 게 이렇게 변했잖아. 웹소설에 쓰이는 문체가 있다고 했어, 안 했어?
아는 게 많아지면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보이는 게 많아지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런 과정을 몇 번이고 겪어본 적이 있기에 나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이 매우 기껍고 안심이 된다. 좋은 방향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잡한 마음을 여전히 떨쳐낼 수 없다. 대박 작품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아무래도 나는 소재부터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 같고, 클리셰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고. 아무래도, 아무래도, 빌어먹을 이 아무래도의 주술이 내 손가락에 걸려서 글을 쓰려고 하면 도로 물리고, 한 줄 겨우 썼다 싶으면 두 줄을 지워버린다.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느라 오늘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목표한 분량을 채우지 못했다. 어제 작업을 마칠 때만 해도 곧 연재 날짜를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설레발인 줄 뻔히 아는 설레발을 치면서 마냥 좋아했는데. 역시 자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을 잘 골라야 했던 걸까. 너무 재미있는 책을 골랐더니 기가 죽어버린 건지도.
나는 늘 내가 어중간하게 걸쳐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고,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으로든 확실한 장르로 구분되어서 정체성의 고민 같은 건 없이 술술 써 내려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누군가가 당신은 이러이러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크리스마스 같은 동생들이 언젠가 해주었던 말.
언니. 예전에는 자꾸 우울한 글만 쓰게 된다고 울상으로 말했었는데, 이제는 언니만이 쓸 수 있는 음울한 게 있다고 하네요. 신기하다.
그 말은 일곱 번의 크리스마스를 건너서 나에게 왔고, 나는 더 이상 과거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또 한 줄의 문장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시 일어서도 될까. 자신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거냐며, 자기도 밝고 명랑하고 귀여운 걸 하고 싶다는 안희연 시인에게 K선생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안희연 산문 「탁성」, 『단어의 집』, 한겨레출판, 2021, 178쪽
더하여 안희연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펴내며 적었던 말까지 다시 새겨본다.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같은 책, 179쪽)
2022년 4월 1일
돌고 돌아 원점이라는 말도 내 일기장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지금껏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돌아보면 그때 그 자리이거나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는 중이었다.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던 때가 많았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면으로 걸어가서 멀어지지 않고 원형으로 깊어지며 작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럽게만 느껴졌던 나라는 사람의 궤도도 독자적인 무늬처럼 보였다. 부끄러움과 자신감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변덕스러운 날들을 살 것이다. 그래도 다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미 다쳐본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일 터다. 요령 좋게 안 좋은 기운을 피해 가며, 해왔던 일을 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내가 해왔던 일은 잘하고 싶던 일, 내가 좋아하는 일. 한 번쯤은 잘한다는 말을 들어봤던 일이다. (2024. 0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