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좋은 생각이 계속 든다. 의욕이 꺾이고 주저앉고만 싶어지는 나쁜 생각들이다. 주기적으로 이런 시기가 찾아오지만 언제나 막막하고 답답하다. 익숙해지지 않을 부채감.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좌절당하며 꿈도 희망도 꺾여 부러지는 환상통에 사로잡혀있다. 이곳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 있을까. 나갈 방도가 있기나 할까.
몸에 익은 일을 따라가는 게 그나마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무적으로 음식을 넣고 씹으면서 겨우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루틴 하나를 실행할 때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따라붙는다. 나의 걸음은 생각의 크기만큼 무겁다. 바람을 가르고 원 없이 뛰고 싶다는 소망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달리기는 자꾸 미뤄진다. 소망의 크기보다 생각의 크기가 크기 때문일까. 내가 너무 무겁다. 물가 근처에 가지 않아도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 나는 일곱 살이 된다. 풀장 바닥에 빗금으로 가라앉으며 이렇게 죽는 거구나, 저항 없이 받아들이던 나로 돌아간다. 그 생각으로부터 나는 반드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한다. 그러면 곧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거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며 선생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거다. 그제야 첨벙, 사람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게 될 거다. 그때 그 남자애는 잘 살고 있을까. 귀찮게 자꾸 이름을 부르고 쫓아다니면서 몇 명의 사람을 더 물 밖으로 끄집어냈을까.
밖으로 끌려 나온 건 내가 아니라 생각이었다. 그 생각들이 모여서 일기가 되었다. 일기를 보관하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난 것도 당연했다. 일기장을 펼치면 물속이다. 몰락하는 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내가 검은색으로 흘린 눈물. 물처럼 번져가는 바닥을 박차며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나를 소망한다. 소망은 나보다 크다. 하루하루 공들여 빚었던 습관들이 오늘 날짜 아래에 잘못 박힌 못처럼 튀어나와 나를 걸고 있다. 삐뚤었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제법 쓸만하다고 느낀다.
2023년 4월 26일
나의 절망은 습관적이다. 나는 계기 없이도 주저앉는다. 때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처럼. 진짜 절망과 가짜 절망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절망적인 기분은 진짜든 가짜든 절망적이다. 진짜고 가짜고 구분할 여력도 없이. 끝없는 바닥으로 한없이 끌려내려 가는 기분만이 선명하다. 그런데 나에게 절망은 정말로 습관이었는지, 습관적으로 버티다가 빠져나온다. 늘 쓰던 분위기의 일기를 쓰고, 꾸역꾸역 밥을 먹고, 먹으면 산다고 했다 중얼거리고. 많이 자고, 자다가 질리면 씻고, 뛰러 나가고. 그러고 돌아와선 또 쓰레기 같은 글을 쓰고, 그게 분해서 글 잘 쓰는 작가들의 책을 파고들다가 재미가 없어서 좋아하는 소설로 옮겨 간다. 뻔한 궤도. 슬금슬금 자리를 찾아가는 루틴과 기분, 의욕. 오늘의 절망이 헛것이라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심으로 나를 내주지도 않는다. 어느 것에도 올인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왔지만, 사실 나는 그 덕에 오래 살고 있다. 지금의 기쁨도 슬픔도 지나갈 것을 안다. 고통은 실제보다 더 고통스럽게 다가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저 스스로 망각될 것이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매 순간 환상 속에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모든 것이 헛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조금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같다. 통증이라도 움켜쥐려는 정도의 절박함으로. 절박함은 글로 남았다. 그런 글들을 많이 써서 나는 살았다. (2024. 0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