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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Jul 18. 2024

개운하지 못한 정리

여러 책의 탄생보다 책 한 권의 죽음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제는 일을 마치자마자 책 정리를 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쌓이기만 한 책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책이라기보다 반복해서 터치한 유화물감 같았다. 그림을 모르는 내 눈에는 외계어 같기만 했다. 뜻 모르는 존재 앞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악몽의 재료가 되기에도 충분한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의자 등받이를 붙들고 수없이 오르내렸다. 물건을 정리하는 내 기분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 다른 물건을 가려서는 안 된다. 둘째, 별수 없이 뒤에 놓이게 되는 물건은 반드시 일부를 드러내어 내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지킬 수는 없지만, 가능한 지키도록 노력한다. 가려진 물건은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정리 대상 1호가 되는데, 대체로 떠밀리기를 반복하다가 안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게 된 것들이었다. 나는 그 물건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거나, 잊지 않는다고 해도 꺼내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등한시한다. 그러는 사이 그것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 종국엔 그 물건들을 내 방에서 퇴장시킨다. 놔두면 언젠가는 쓰겠지라는 말을 도통 실천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지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을 앞으로 잘 써먹을 확률은 낮다. 나는 나의 고정 불변한 기질을 제법 잘 파악하고 있는 편이고, 때문에 내가 더는 손을 대지 않을 물건들을 기막히게 구별해 낼 수 있다.


책을 제대로 꽂으려면 빈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규모가 정해진 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비애다. 방을 잡아 늘려서 책장의 크기를 키우지 않는 한 내가 가질 수 있는 책의 수량은 한정되어 있다. 빈자리를 만들려면 당장 읽지 않는 책을 책장의 맨 위칸으로 올려야 한다. 거기에 두려면 그곳에 있던 책들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이다. 켁켁거리며 먼지 묻은 천을 벗겨내니 지난 1년 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책들이 얼굴을 드러낸다. 반가운 책들고 있고, 이게 왜 아직 있지? 싶은 책들도 있다.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사를 오기 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처럼 오래되고 멀게 느껴진다. 가려두고 쳐다보지도 않은 효과일까? 책들을 선별해서 바닥으로 내렸다. 이미 읽었으나 다시 읽지는 않을 것 같은 책들, 전자책으로 대체 구매할 책들, 다시 읽을 것 같은데 시중에서 언제든 구할 수 있을 법한 책들. 제법 넉넉한 공간을 만든 후에 의자에서 조심조심 내려간다. 그러곤 26칸의 책장을 구석구석 훑으며 1년 안에는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선별해서 위로 올린다. 이제 막 생긴 빈자리에 할머니집 장롱 속 이불처럼 책들이 하나둘 포개진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창문을 열어 얼굴을 밖으로 내놓고 다급히 공기를 흡입하고 있다. 먼지는 많고, 내 체력은 바닥이다. 책장 정리를 자주 하는 편인데도 어느 쪽도 나아지는 부분이 없다.


바닥에 놓인 책들은 방문 옆에 가지런히 쌓아둔다.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가거나, 증고서점에 팔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처분하게 될 책들이다. 이 시간은 언제나 기분이 안 좋다.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물건을 바로바로 정리해버리는 결벽에 가까운 고질적인 기질도 기적적으로 고쳐질 것 같은 순간이다. 하지만 나에겐 정해진 공간이 있고,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이때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보려고 책 한 권을 살 때 만 번의 고민을 하자 같은 규칙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내게 왔다가 다시 가는 책들. 자연스러운 순환인데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그런 걸 모르려면 역시 정리를 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나. 먼지 묻는 몸을 싹싹 닦으면서도 먼지 틈에 낀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2021년 11월 10일




스스로 '책장 정리를 자주 하는 편'이라고 말하다니. 놀랍다. 한때나마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나 보다. 지금의 나로서는 꿈만 같은 소리다. 책장 정리를 해본 지가 언제인지. 틈틈이 먼지를 털고, 책 주변을 걸레로 훔치는 게 고작이다. 책의 권수를 절반으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하고 있는데, 한편으론 이미 체념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도 있다. 곧잘 하던 일을 유지하기는 어려우면서 그만두기는 왜 이리 쉬운 건지. 좋은 습관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

책을 처분할 때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 나누기도 팔기도 버리기도 내키지 않는 것이 책이라는 물건인 것 같다. 때문에 소장할 책의 기준만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남겨둘 책만 산다면 처분의 고민도 덜할 테니. 물론 그도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실패의 경험만 늘어간다. 꼭 그와 관련해서는 아니어도 요즘은 전자책이나 도서관 대여 횟수가 부쩍 늘었다. 중고책 판매에 익숙해지면서 구매 쪽으로도 관심이 생기고 있다. 기왕 세상에 나온 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오래 활용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2021년 일기에서 오늘까지 넘어오는 사이 나는 여러 책의 탄생보다 책 한 권의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2024.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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