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아를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무 연관성이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이는 나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 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문학동네, 26면
이 책이 나를 바꿀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부터 읽는 문장이 나의 형태를 다시 빚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일그러짐의 감각인지. 거의 십 년만인가?
십 년 전 뼈와 살과 영혼이 지금보다 덜 여물었을 때. 스치는 바람에도 상처가 났고, 넘어지지 않아도 무릎이 깨졌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라 아침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침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 축. 나는 척추를 바로 세우고 걷지 못하는 아이. 축적된 절망이 무릎까지 따뜻하게 차올랐다. 절망 속을 헤집고 걷느라 발가락의 살점이 벗겨졌다. 새끼발가락부터 천천히, 조금씩. 단단해진 마음은 뼈 밖에 남지 않은 몸. 관절이 도드라진 손가락 그림자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춘다. 타란툴라의 다리처럼 우아하게. 모니터 화면 속에서 밤마다 자라는 거미줄. 포획할 대상도 없이 커지기만 하는 빈 수레. 뇌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