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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May 09. 2024

어느 성장담


깜짝 놀라는 내 모습이 죽을 만큼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나를 놀래키는 남자애가 있다면 우주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쫓아가 정강이를 걷어차버릴 정도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몇 시간이고 씩씩거렸던 기억이 난다. 분을 못 이겨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울고 싶어서 우는 것이 아니었으니 화난 얼굴로 입술은 꾹 다문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당황했다. 얻어맞은 건 저희들인데 나를 달래려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애들 입장에선 친한 사이에서 얼마든지 주고받는 시시한 장난이었으니 당황스럽기도 했을 터다. 하지만 상대가 나였다. 하필이면.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나도 눈만 끔뻑거리는 어른으로 자라고 싶은 고집쟁이였다.


상상하기는 좋아해도 상상력은 빈곤했던 아이였던지라 어른에 대한 환상이 많진 않았다. 하지만 몇 개 없는 그것들을 모아보면 ‘의연함’이라는 공통점이 나왔다. 묵묵함, 임기응변, 일사천리, 여유로움 같은 말이 뒤를 이었다. 요약해보면 나는 어떤 일을 맞닥뜨리든 의연하고 침착하게 잘 해결할 수 있는 만능꾼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거기에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더하고 화룡점정으로 약간의 카리스마까지 더하면…… 지금의 나도 꿈꾸고 싶을 만큼 멋진 어른이 될 테지.


꿈이었으니 노력을 하기도 했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담을 키우기가 그중 하나였는데, 놀라지 않겠다고 온갖 대안을 다 떠올리다 보니 부정적인 상상에 절여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하려들지 않았다. 생각한다 해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었다. 나는 그 적정선 너머를 주시했다. 돌파했다. 바닥보다 더 바닥, 최악보다 더한 최악도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날이 더 부정적인 상상에 파묻혔고, 독설 설교자라는 평을 듣는 매우 비관적인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슬픈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202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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