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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하게 May 12. 2024

손바닥이 아프다는 것만 알았다


첫 등교 날에는 기운이 나지 않는다. 처음이라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나였어도, 새 학기만큼은 도무지 친해질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학교생활을 해나가야 할지, 아니 당장 오늘을 어찌 보내야 할지. 마음은 막막하고, 운동화 뒤축만 직직 끌렸다. 다행히도 나 같은 애들이 적지 않아 보였다. 운동장에 줄 맞춰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면 나와 닮은 얼굴이 군데군데 보였다. 누가 말을 걸어도 상냥하게 대답해줄 것처럼 인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누군가 뒷덜미를 강압적으로 잡아올린 것처럼 승모근을 한껏 세우고 있는.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들. 이미 친구였거나, 지금 막 친구가 되어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쪽을 흘끔거리는 시선 또한 비슷했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둘러 딴청을 부리는 소심함마저도. 운동장은 넓었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다. 한 달 뒤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용암처럼 넘쳐흐르는 순간. 순간의 연장.


선생님들도 사정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 같은 아이의 걱정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어른이라는 점에서 상황이 훨씬 나았다. 교무실이 있는 본관 건물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운동장으로 나왔다. 미리 나와서 아이들을 통솔하거나 장난을 치고 떠들던 이들은 원래 있던 교직원들이었다. 올해 새로 옮겨온 선생님들만이 뒤늦게 나와서 아이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각자가 맡은 반을 찾아갔다. 낯선 얼굴의 선생님이 자신의 자리를 채울 때마다 작은 소요가 일었다. 어느 반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박수 소리가 나기도 했다. 우리 반을 맡은 선생님은 왔는지도 모르게 도착해있었다. 피부색이 너무 하얘서 신기했다. 그런 식으로 하얀 사람은 처음 보았다.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연회색 슈트를 차려입었고, 연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서 하나로 질끈 묶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네모난 금테 안경을 썼는데, 오래전 작은 아버지가 쓴 것과 비슷해서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다. 옆 반의 남자 선생님만큼 키가 컸지만 그에 비해 절반 가까이 마른 체구로 여자가 아닐까 싶었다. 가느다랗고 매끈한 목선과 부러질 듯 얇은 손목. 수염 없는 하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금색 귀걸이…… 힐긋거리며 찾아낸 정보들은 그가 여자임을 알려주었지만, 더는 관심이 없었다. 조회가 끝날 때까지 내가 관심을 가졌던 건 그의 손에 달린 금속성의 긴 막대기였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속이 꽉 찬 지휘봉. 손잡이에 달린 술이 흔들렸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얼굴을 올려봤다. 무표정하거나 찡그리거나. 새로 배정받은 반에는 장난기 넘치는 남자애들이 많았다. 교장 선생님의 느긋한 훈화 말씀 속에서 열두 살 난 아이들의 웃음은 새소리처럼 맑고 튀었다.


조회가 끝난 뒤 교실로 들어가 배정받은 자리에 앉았다. 지휘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반 애들은 신기하게도 그 일을 해냈다. 내 자리는 4분단 앞쪽이었는데, 모둠 수업용으로 책상을 배치했던 터라 왼쪽과 정면, 오른쪽 모두 새 친구에게 둘러싸인 꼴이었다. 다행히도 모두가 서글서글하고 말도 잘하는 애들이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 조가 짱 먹을 것 같다, 짱 먹는 건 몰라도 확실히 조원은 잘 만난 것 같다, 시작부터 운이 좋은데?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필통을 꺼냈다. 물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햇빛은 따뜻한데 공기는 서늘한 날이었다. 햇빛 드는 창가에서 가장 먼 자리여서인지 한기가 더 느껴졌다. 벽에서 찬 기운이 나오나? 같은 시답잖은 걸 말해도 되나 생각하는 찰나 교실문이 거칠게 열렸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교실문이 부서질 듯 닫혔다. 담임선생님은 동상처럼 서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동상 같았다. 선생님이 말했다. “손 내밀어.” “네……?” 내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왼쪽에 앉은 애가 멍하게 물었다. “손 내!” 고함소리에 놀란 그애가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선생님이 아이의 손끝을 모아잡았다. “다들 이렇게 내밀고 있어.”


지휘봉의 술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나는 네 번째로 손바닥을 맞았다. 양 손바닥에 붉은색 한줄이 빠르게 부어올랐다. 맞을 때 잘못 맞았는지, 왼쪽 새끼손가락 아래가 이상할 정도로 아팠다. 그 자리는 구슬만큼 부어 올랐다가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맞아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맞기 싫어서 숙제를 빠짐없이 해가고, 성적을 꾸준히 유지하는 학생이었으므로 내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손바닥만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어느덧 교탁으로 가서 서 있었다. 말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고,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선생님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 틈에 보이는 손바닥이 얼굴보다 더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너희가 왜 맞은 줄 알지?”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선생님이 교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알아, 몰라!” “……알아요.” 나는 다시 손바닥을 보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아프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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