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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사진(9)

잘 알려지지 않은 1971년 1월 4일 묵호 해일

by 강동수

2024년 1월 1일 동해안에 지진해일이 발생한 이후 필자가 강원도에서 발행한 『알찬 새 강원 건설(1971. 03. 25.)』이란 책을 구하여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 한 장과 함께 1971년 1월 4일 묵호 앞바다에 해일이 발생하여 선박과 제방이 유실되었다는 한 줄의 기록이 있어 기상청 자료 등을 찾아보았으나 이 해일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묵호 앞바다의 해일 Ⓒ『알찬 새 강원 건설(1971. 03. 25.)』


그러나 1971년에 발생한 이 해일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2023년 10월 6일 자 《대한경제신문》에서 「건설로 읽는 현대사, (33) 완공에 14년 걸린 울릉도 저동항」 기사와 1971년 5월 14일 부산지방해난심판위원회에서 ‘기선 천신호 승양 사건’에 대하여 주문(主文)한 결정문(부산해심 제1971-019호)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1971년 묵호해일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으며 그 자료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건설로 읽는 현대사, 완공에 14년 걸린 울릉도 저동항」 기사의 내용


“(전략)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10월 10일 강원도 주문진항에서 해군 함정편으로 울릉도를 향해 출발했다. 울릉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접안시설이 없어 보트로 갈아타야 했다. 박 의장은 다음날 울릉도에서 군청, 경찰서, 초등학교 등을 시찰했다. 박 의장은 군수로부터 울릉도 현황을 듣는 자리에서 섬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중앙에서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울릉도 개발은 1962년 박 의장의 시찰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중심은 저동항 공사였다. 저동항 개발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965년이다. 이때 대구 소재 업체가 개발사업에 나섰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공사를 포기했다. 수산청은 1966년 7월 다시 저동항 방파제 및 물양장 축조공사를 발주했고 삼부토건이 수주했다. 삼부토건은 이것이 인연이 돼 14년 동안 울릉도의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다. (중략)


삼부토건은 준비과정을 거쳐 1967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현장 주변은 케이슨 제작에 필요한 넓은 평지가 없는 대신 사석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파제는 사석과 블록식으로 계획됐다. 1967년부터 68년까지 블록 제작장을 만들고 종전 업체가 포기한 남방파제 102m에 대한 복구공사를 완료했다. 1969년에는 중력식 구조의 물양장 69m를 축조했다. 방파제보다 물양장을 먼저 만든 것은 방파제에 필요한 이형블록을 쌓아둘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 시련은 1971년 1월 4일 닥쳤다. 동해안 일대를 강타한 해일이 남방파제 102m 전 구간에 설치해 놓은 10톤급 이형블록을 하나도 남김없이 휩쓸고 갔다. 여기에 바지선 2척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고 육상 크레인 2척도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예인선도 일주일 동안 표류해 있다가 가까스로 귀향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하지만 계약을 맺은 이상 공사를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략)”


2. 부산지방해난심판위원회 결정문


“[승양] [기선 천신호 승양사건]


[부산해심 제1971-019호, 1971.05.14]


(전략) 원인


해일 기상에 대한 부주의


기선 천신호는 항로 정한 연해구역의 화물선인바 주로 한일간의 한신(阪神) 항로에 취항하고있던 중 무연탄, 758K/T을 적재하고 선수 3미터 49, 선미 4미터 05의 흘수로 1971년 1월 3일 21시 05분 묵호를 떠나 목적지인 제주도로 향하여 매시 8노트의 전속력으로 항행하였다.


동월 4일 04시 10분 후포 등대를 우현 3.2마일 거리로 통과 속항(續航) 중 동시 30분경부터 바람이 남서에서 서풍으로 변하면서 돌풍이 일어났으며 동일 07시 00분을 기하여 동해 해상 전역에 걸쳐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점차 기상이 악화되었고, (중략) 동일 21시 30분경부터는 거센 풍랑과 함께 심한 해일 현상이 일어나 쉘(SWELL, 너울)이 항(구룡포항)내로 몰아치므로 (중략) 이어서 다음날인 03시 25분경부터는 더욱 큰 쉘이 4, 5차례 연달아 선체에 부딪히게 되자 선체는 우회두하면서 육안으로 떠밀리는 순간 우현 묘쇄(닻에 연결된 쇠사슬)가 절단되고 동일 03시 32분경 동 항(구룡포항)내 해안선 모래사장에 승양하였다.


당시의 기상은 맑고 흐린 날씨에 서북서풍 16미터 동해안(東海岸) 일대에서는 심한 해일 현상이 일어나 동 항(구룡포항)내에서는 높이 6미터의 쉘이 밀어 닥쳤으며 각처에서 많은 인명과 선박 손실을 가져 왔다.”


위의 두 자료를 통하여 1971년 묵호 해일은 이상 기상으로 인한 폭풍해일로 추정되며, 울릉도에서의 피해 규모와 천신호 승양 사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해일로 인한 피해가 동해안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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