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의사 홍순태
몇 해 전에 읽었던 『강회문유백년사(講會文儒百年史)』를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강회계(講會契)의 일원이었던 홍순태 공의 항일독립 의지를 지역에 널리 알려 재조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어 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홍순태 의사는 남양 홍씨 교수공(敎授公)의 후손으로서 삼척 근덕면 맹방 출신이며, 1906년 9월 9일 중구절(重九節)의 뜻깊은 날에 현 동해시 송정동에 소재한 만재 홍락섭(洪樂燮)의 사저(私邸)를 산실로 하여 창립된 강회계(講會契)의 일원이었다.
강회계의 본질은 학계(學契)로서 학문과 학덕을 닦고 장려하는 흥학(興學)의 계이며, 창립 특성은 시대적 개화를 이끌어가는 인재 육성이었다. 오늘날의 보편적 의미의 계와는 확실히 구별되며 현재의 학회 또는 장학회의 개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창계원(創契員)의 시나 문집을 통하여 내면성을 고찰해 보면 항일사상과 민족자주권의 회복을 통감하고 있었으며, 1905년에 통감부와 일본국주둔군사령부(日本國駐屯軍司令部)가 설치되고 1906년에 경제권 박탈의 하나로 금융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농공은행을 설립하는 시기와 맞물려 항일적 민족혼과 의협심이 강한 사람들이 쇠퇴해 가는 국권과 일제의 강점에 통분하여 창립기의 시문(詩文)과 기문(記文) 등에 항일사상을 통렬하게 표현하며 민족 교도(敎導)에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창계원의 한 분이었던 홍순태(洪淳泰) 공(公)이 1913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연해주로 망명하였다는 것은 매우 경이적인 사실이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국권이 상실되었고 내정을 깊이 감찰하면서 국민적 자위권(自衛權)과 나아가서는 시민 생활의 행동까지 극단적으로 제약하였다. 이에 분개한 홍순태 창계원은 국권 회복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충정으로 1913년 연해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 후 2~3차례 인편을 통한 밀지의 편지가 있었다. 그 소식통에 따르면 구(舊)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新民會) 운동을 전개하던 함북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과 합류하여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서북학회(西北學會) 등을 통하여 개화운동을 한 바 있다.
그 후 1919년 이동휘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가 되었으므로 그 일원으로 북간도 일대에서 독립 무장투쟁을 하는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을 지원하였다. 그 실례로는 홍범도 장군이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을 모으고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간도 지방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 함께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동북 만주와 노령(露領, 러시아의 영토)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홍범도 장군은 북만주의 대한독립단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 6월에는 일본군 제19사단의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를 공격하여 대 전과를 올린 바도 있다.
또한 3‧1운동 전후에는 여러 차례 밀사를 통하여 민족 봉기의 격문을 강회계에 보내온 바 있고 지원의 결의를 표한 바 있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강회계의 일원인 홍순태 공이 연해주를 배경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해‧삼척 지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