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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by 강동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는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山梨)현 키타코마(北巨摩) 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931년 4월 2일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는 자신의 유언대로 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묻혔다가 1942년 망우리 공원묘지로 옮겨와 오늘에 이른다.


아사카와 다쿠미. Ⓒ호쿠토 시(北杜市)

1906년 야마나시현립 농림 학교에 진학한 이듬해인 1907년 8월 야마나시현에서 산림의 무분별한 남벌과 도벌에 의한 수해로 하천이 범람하여 232명이 사망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조림(造林)의 중요성을 통감하였다.


1909년 농림 학교를 졸업한 후 아키다(秋田) 현 오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국유림 벌채 작업에 종사하였으며, 1914년 남대문심상소학교 교원인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 일본의 조각가이며 조선 도자기 연구가)의 권유로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획기적인 '잣나무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해 조선의 소나무의 양묘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여 민둥산이었던 산하를 푸르른 상록수로 입히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임업연구원(현 국립산림과학원) 전 조재명 원장은 “우리나라의 인공림 37%가 그의 작품이며, 광릉국립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양묘(養苗)용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많은 조선 사람과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진 형과 함께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답사하고 조선의 도자기와 민예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관심을 가져 『朝鮮の 膳(조선의 소반)』과 도자기의 명칭, 형태와 기원을 조사해 정리한 『朝鮮陶磁名考(조선도자명고)』를 저술하였으며 또한 민예 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교류하며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도 앞장섰다.


형제가 수집한 도자기와 공예품이 3,500점이 넘었는데, 형 노리타카가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국하며 조선의 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고 한다.


조선의 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마흔 살에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며 "몸과 마음을 모두 조선에 남기고 싶다"는 바람대로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되었다. 매년 4월 2일 망우리 공원에서 조선의 산림과 문화 보존을 위해 힘쓴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기 위하여 한‧일 합동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한일합동 아사카와 다쿠미 93주기 추모식. Ⓒ연합뉴스


끝으로 1928년 아사카와 다쿠미가 『朝鮮の 膳(조선의 소반)』 을 집필하면서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疲れた朝鮮よ, 他人の真似をするより, 持っている大事なものを失わなかったなら, やがて自信のつく日が来るであろう. このことはまた工藝の道ばかりではない.”

"피곤한 조선인이여. 타인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공예의 분야만은 아니다."

그가 남긴 이 글을 읽으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K-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과연 필자만 느끼는 감정일까?


〈참고 자료〉

경기신문, 「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93주기 추모식' 구리시 교문동 망우리 공원에서 열려」, 2024. 04. 03.

아사카와 다쿠미, 『朝鮮の 膳』, ちくま學藝文庫, 2023.

연합뉴스, 「"한국인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 양국 추모」, 2024. 04. 02.

중앙일보, 「"내 몸과 마음 조선에 남겨 달라" 이런 유언 남긴 日 형제 정체」, 2022.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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