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동해안에서 철도와 항만이 연결된 유일한 항구
얼마 전 홍협 동해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으로부터 2016년 코레일유통주식회사에서 발행한 『코레일유통(주) 80년사』 중에서 「묵호항 항만하역사업」에 대한 글을 받아 보았는데 여기에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묵호항 항만하역사업의 전개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어 지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하여 글의 원문을 소개하고자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5년 1월 10일 일본전력연맹 서기장 마츠네 우이치(松根宇一)와 그 산하 회사인 일본전력주식회사 부사장 나이토우 쿠마키(內藤熊喜)가 조선총독부 식산국(殖産局)을 방문한다. 이들은 일본의 부족한 석탄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의 삼척과 영월의 석탄광을 개발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1934년 중 일본이 소비한 석탄은 총 3천800만 톤이고 1933년에 비해 649,000톤이 증가했다. 이중 전력 부문의 사용량은 2,531,000톤이고 이것은 전체소비량의 6.7%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러나 일본 내 석탄 채취량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소비하는 발전용 석탄을 조선에서 구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구체적인 공동조사에 들어간다. 삼척과 영월의 석탄은 개발을 보류하고 있으나 연간 60만 톤을 채굴할 수 있으며 그중 50만 톤 정도를 일본으로 보내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탄전개발은 민간업자인 일본전력주식회사가 맡고 채굴된 석탄을 이송하기 위한 철도와 항구 건설도 일본전력주식회사가 주도하기로 한다. 1935년 일본전력주식회사는 이 사업을 담당할 자회사 조선전력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당초 채굴된 석탄은 동해안의 기존 항인 강릉과 정라진항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운송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삼척탄전과 강릉, 영월탄전과 정라진을 연결하는 철도 부설이 필요하고 두 개 항구에 새로운 하역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전력주식회사와 협의하여 석탄 수송을 위한 새로운 항구를 개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당시 가구 400호의 작은 어항 묵호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석탄은 북한 지역에서 나오는 채굴량으로도 충분했다. 남한 지역의 삼척과 영월의 탄광 개발은 순전히 일본에서 사용하기 위한 식민지 자원 약탈 차원으로 시작된 것이고 개발주체인 민간기업 일본전력주식회사의 이윤 추구가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1936년 3월 12일 조선전력주식회사는 삼척탄전을 개발할 삼척개발주식회사와 채굴된 석탄의 운송로를 건설할 삼척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자본금 5백만 원을 조선전력주식회사가 전액 출자하고 사장에 나이토우 쿠마키(內藤熊喜)를 임명한다.
삼척철도주식회사는 1937년 7월 1일 묵호항에 석탄수송부두[목재 잔교에 트로리카(trolley car)에 의한 인력 선적 작업]와 방파제를 설치하였다.
1939년 6월에는 묵호항 선적 시설을 개선하여 철제잔교에 컨베어를 설치하였으며 1939년 7월 1일 묵호~도계 간 총 43km의 철도 부설을 완료하면서 본격적인 무연탄 해륙수송을 개시한다. 육로(화물열차)를 통해 대량 수송한 무연탄을 1천 톤급의 대형 선박에 실어 일본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묵호항은 이로써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하였고, 환동해안에서 항만과 철도가 연결된 유일한 항구로 철도 운반 광물을 즉시 선적 가능하게 됨으로써 일제의 지하자원 약탈의 중심항구로 떠올랐다.
1944년 2월 11일 조선총독부 교통국은 삼척선(북평역~삼척역, 12.9km)을 개통하여 삼척철도주식회사에 경영권을 위탁하였고 긴급철도부설권을 허가함으로써 묵호항 주변에 석탄이송을 위한 10여 개의 사설철도가 부설되었다.
당시 묵호항의 무연탄 수송 능력은 철도수송과 컨베어벨트에 의한 선적 작업으로 연간 30만 톤 규모에 달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삼척철도주식회사는 지역유지가 맡아서 1년 이상 운영하다가 1946년 10월경에 가서야 미군정청 상무부 관할로 넘어갔다.
1948년 8월 10일 정부수립 직전 미군정청은 행정명령 제28호를 통하여 마지막 남은 사설철도인 삼척철도를 국유화하고 송탄기와 하역시설을 포함한 묵호 항만시설에 대한 관리감독권 일체를 상무부에서 운수부로 이관하였다.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남한의 석탄 수급 사정이 긴박해지자 채굴을 제외하고 석탄 수송의 전체 과정을 일원화하여 석탄 수요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3월 16일 국유화된 삼척철도와 함께 삼척개발, 내무부 묵호항무서를 통합하여 교통부 산하 삼척운수국이 설립된다.
특히 우리사(코레일유통주식회사)와 관련해서는 해방 직후 교통강생회 상임이사를 역임했던 신의식(申義湜)이 삼척운수국장으로 부임하게 됨으로써 묵호항 자원 유통사업의 첫발을 떼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다.
(중략)
1949년 3월 16일 초대 삼척운수국장으로 취임한 신의식은 1949년 9월 삼척운수국이 직영으로 운영하던 묵호항 항만하역 노력 공급사업 중 선적 작업을 교통강생회에 위탁한다. 국가기관으로서 작업 여건이나 인력관리, 노무비 부담 등 제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하역사업을 이관한다는 명분을 걸었지만, 그 이관 대상이 교통강생회가 된 것은 아무래도 전임 교통강생회 상임이사였던 삼척운수국장 신의식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10월 1일 교통강생회는 묵호사업소를 설립하고 삼척철도국으로부터 직원 60명, 노무원 250명을 인수하여 묵호항 선적 작업을 개시한다. 창립 이후 13년 동안 철도역 구내 및 열차 내 식음료 판매를 주업종으로 하던 교통강생회가 전혀 이질적인 묵호항의 무연탄 하역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하역사업이 시작된 지 4개월 후인 1950년 2월 11일에는 삼척철도국장 신의식이 재단법인 교통강생회 최초의 상임 이사장으로 부임한다.
그러나 하역사업 인수 후 불과 9개월이 못돼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1년 6개월여의 기간 동안 하역사업은 중단된다.
1951년 12월 12일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컨베어 반송기 운전이 재개된 후 2015년 현재까지 64년 동안 중단없이 무연탄 등 영동지방의 지하자원이 묵호항 우리사 사원들의 손을 거쳐 국내와 해외로 옮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