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흉년에 구활(救活)한 아이를 노비로 삼기 위한 청원서
동해문화원에서 발행한 『동해시 고문서(二)』에는 단 1건의 노비 입안 신청에 관한 김세기의 소지(所志)와 일괄 문서가 실려있는데 이에 대하여 소지의 내용과 더불어 삼척부에서 판결하여 처리한 입안(立案)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김세기의 소지 내용을 번역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化民金世紀右謹言所志矣段民亦去月望間良中偶然出他爲有如乎路傍棄兒男女幾至死域悲泣仆地爲有臥乎所人命可憐果爲率來救養爲乎旀問其父母與名字則父母皆爲不知而男則名曰承男女則京德云爾而如此大無之年將來生活未可必也
是乎矣今行朝家事目內慘酷凶歲勿論良賤救活人命則永作奴婢亦事目本意如許是乎等故緣由仰訴爲白良爾依事目三切隣捧招立案成給事乙各別行下爲只爲行下向敎是事
都護府處分
丙戌 三月 日所志”
화민 김세기가 삼가 소지로써 아뢰는 것은 저가 지난달(2월) 보름께 우연히 출타하였다가 길에 방기된 어린 남녀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슬피 울면서 땅에 엎드려 있어 인명이 가련하여 데리고 와서 구양하며 그 부모와 이름을 물으니 부모를 모두 모르고 남자아이는 이름이 ‘승남’이라 하고 여자아이는 ‘경덕’이라 할 뿐이니 여차하면 대흉년에 장래 생활이 불가하옵니다.
지금 행해지는 조정의 사목 내에 참혹한 흉년에 양천을 막론하고 인명을 구활하면 영구히 노비로 삼는다는 사목의 본뜻이 허락하는 까닭에 앙소하오니 사목에 의거하여 3명의 가까운 이웃의 진술을 받고 입안하여 성급하는 일을 각별히 처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도호부 처분
병술 3월 일 소지 Ⓒ강동수
* 화민(化民): 자기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곳의 백성이 그 고을의 원에게 자기를 이르던 말.
* 소지(所志): 개인이 관청에 올리는 청원서, 소장(訴狀), 진정서, 탄원서 등을 이름.
* 망간(望間): 음력 보름께.
* 방기(傍棄):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
* 구양(救養):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여 양육함.
* 대무지년(大無之年): 대흉년.
* 구활(救活): 위태롭거나 곤란한 지경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여 살려 줌.
* 사목(事目): 공사(公事)에 관하여 정한 규칙.
* 앙소(仰訴): 우러러 하소연하거나 상소함.
* 봉초(捧招): 죄인을 문초하여 구두로 진술을 받던 일.
* 입안(立案): 조선 시대에 관아에서 어떠한 사실을 인증(認證)한 서면(書面).
* 성급(成給): 문서나 증서 등을 작성하여 발급함.
* 행하(行下):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지시나 명령을 이르는 말. 공문을 하달함.
위 소지는 1706년(숙종 32) 3월에 삼척부 북평면(현 동해시)에 사는 김세기가 흉년에 구활한 어린 승남과 경덕을 노비로 삼기 위해 도호부에 올린 일종의 청원서이며 이후 입안을 받는 데 따른 일괄 문서를 보면 삼척부사가 김세기의 입안 신청 소지와 증인인 이환(李還), 노 약봉(奴 若奉), 노 언남(奴 焉男)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여 김세기가 승남과 경덕을 노비로 삼는 것에 대해 확인해 주는 입안을 발급하였다.
조선은 을병대기근(1695~1699)이 시작된 이후 『숙종실록』에 따르면 1697년(숙종 23) 2월 10일에 심지어 살아 있는 사람의 고기를 먹으며 시체의 옷을 벗겨서 입으니 참으로 예전에 없었던 변고(變故)로 식자(識者)들이 한심스럽게 여길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으며 또한 1698년(숙종 24) 4월 10일에 부응교 이건명(李健命)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불행하게도 나라에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 간에 저장된 것이라고는 비로 땅을 쓴 듯 깡그리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기근에 다급해진 조선은 1698년(숙종 24) 2월과 4월에 청(淸)나라에서 교역미(交易米)와 무상(無償)을 합하여 6만 석을 받아 백성을 구휼하였으나 계속된 흉년으로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을병대기근 시기 5년간 지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대략 14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니 기근의 참혹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은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었다.
또한 1706년(숙종 32) 1월 1일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감사(監司)와 유수(留守)에게 내리기를, “아! 섣달이 다 가고 봄철은 닥쳐 천지(天地)가 온통 화창하여 우로(雨露)의 혜택을 말랐던 풀뿌리도 힘입고 있는데, 서러운 우리 동포(同胞)의 백성은 거듭 흉년을 만나 유독 위망(危亡)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마땅히 어떤 심회(心懷)를 가져야 할 것인가? 아! 여러 해 동안 흉년으로 공사(公私)가 탕진(蕩盡)이 되어 진휼(賑恤)을 베풀 것도 영원치 못하고, 곡식을 모은 것이 많지도 않으니 팔로(八路)에서 먹여주기를 바라는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구제해 살려서, 한 사람이라도 수척(瘦瘠)하여 죽는 이를 없게 할 것인가? (후략)”라고 한 것을 보면 1700년대 초에도 매년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기근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706년에 삼척부 북평면(현 동해시)에 사는 김세기가 외출하다가 굶주려 우는 어린 남녀를 발견하고 구활하여 이 남녀를 노비로 삼고자 도호부에 입안을 신청하는 소지가 1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삼척부에서도 기근으로 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일이 생기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98년(숙종 24)에 왕명으로 편찬한 조선 후기 법령집인 『수교집록(受敎輯錄)』 「예전(禮典)」 「혜휼(惠恤)」에 따르면 “1643년(인조 21)에 버려진 아이를 3세 이전에 거두어 양육한 자에게 관(官)에서 입안(立案)을 내어주고 아이의 옷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면 장성한 뒤에는 곧 그 (양육한 자의) 아들이나 노비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법례이다. 이제 이러한 버려진 아이에 대해서는 8, 9세 이전으로 제한하여 그 양측의 사정과 원하는 바를 들어서 구제하여 살리는 것을 허락하되, 양인(良人)이나 공·사천(公私賤)을 논하지 말고 그 부모 및 담당 관리와 가까운 이웃을 상세히 조사하여 초사(招辭)를 받고 입안을 만들어주어 뒷날의 근거 자료로 삼음으로써 간사하고 거짓된 폐단이 없도록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1671년(현종 12)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 사이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 경우에는 양민(良民)과 공·사천(公私賤)을 논하지 말고 그 뒤의 소생까지 모두 영구히 노비로 삼되, 15세를 한도로 삼는다. 16세 이상이면 본인에 한하여 고공(雇工)으로 삼고, 그 소생은 모두 본역(本役)으로 돌린다.”라는 법도 시행하였다.
김세기도 1706년 당시에 행해진 버려진 아이를 노비로 삼는 규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를 통하여 흉년에 구활한 남아 승남과 여아 경덕을 노비로 삼았으며 이는 1720년 김세기의 준호구에 “구활노(救活奴) 승남 36세, 구활비(救活婢) 경덕 32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의아한 점은 1706년에 ‘어린 남녀’라고 하였는데 1720년에 작성된 준호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구활 당시에 승남은 22세, 경덕은 18세였던 점으로 보아 소지에는 나이 규정을 맞추기 위하여 임의로 ‘어린 남녀’로 작성한 것은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는 강릉 자매비(自賣婢) 초정(草正) 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계속되는 기근으로 조선 후기에 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세수 감소로 인한 국가 재정 악화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사회적 불안과 신분제 동요의 시작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