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 삼화동에 위치한 삼화사(三和寺)는 642년(선덕여왕 11)에 자장이 절을 세우고 ‘흑련대’라 하였으며 그 후 864년(경문왕 4)에 범일국사가 불사를 건립하고 ‘삼공암’이라 불렀고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1660년(현종 1)에 중대사 터에 중건하였다. 1823년(순조 23) 9월 8일 산불로 인하여 소진된 것을 다음 해 침송대사가 옛터에 다시 지었으나 1829년(순조 29)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강원감사 이기연과 삼척부사 이광도 등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906년(고종 43)에 의병들의 은신처 제공과 병참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수비대가 대웅전을 비롯한 2백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을 다음 해 송학선사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석장이 생기면서 다시 중대사 옛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화사의 주요 문화재로는 철조노사나좌불(보물 제129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이 있으며 전적류로는 국행수륙대재 의례서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의 덕주사본과 갑사본이 각각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6호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삼화사에는 이들 문화재 외에 높이 약 20cm의 목불(木佛)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분실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으며 이 글에서는 분실된 목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998년 동해문화원에서 발행한 『동해시 삼화동의 기층문화』에 따르면 “삼화사(三和寺) 옛 절터에는 목불이 있었던 것으로 자료가 남아 있는데 목불의 몸통 부분에서 여러 장의 문서도 나왔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진홍섭 교수가 1976년 『고고미술』에 실은 「삼화사의 탑상」 내용 중 목불을 소개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삼화사에는 또 하나의 목조불상이 체장(剃藏)되어 있다. 체발(剃髮, 머리털을 바싹 깎음)의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이다.
상호(相好,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는 구형에 가깝도록 둥글고 작은 이목구비가 조형상 균형을 잃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통견(通肩, 앞가슴을 둘러 양어깨를 덮어 입는 부처의 옷차림)한 법의(法衣)는 매우 두껍다. 법의의 일단(一端)은 좌견(左肩, 왼쪽 어깨)에서 뒤로 걸쳐 있고 오른팔에서도 뒤로 한 가닥이 돌아가 있으나 부자연스럽다. 두꺼운 법의로 해서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의 표현이 뚜렷하지 않고 다만 팔과 무릎의 윤곽을 알 수 있을 뿐이나 몸이 상호(相好)와 한가지 비만형임이 분명하다. 의문(衣紋, 옷의 무늬)의 처리 또한 형식적이고 박력이 없다. 가슴 밑에 군의(裙衣, 치마)의 일단(一端)이 나타나 있음도 사실적이 아니다.
두 손은 양쪽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손가락의 표현은 둔하다. 의단(衣端, 옷 가장자리)은 무릎 앞에서 반월형을 그리는 듯하나 좌반부에 손상을 입었고 우묵하게 판 사각에 가까운 받침을 따로 만들어 안치하였다. 원래는 전면에 채색을 하였던 듯하여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머리에는 아직도 흑색이 남아 있다.
저면(底面, 밑바닥)에는 불신(佛身, 부처의 몸) 밑에 10⨉9cm의 삼각추형(三角錐形)의 구멍을 12cm 깊이로 파고 복장(腹藏)을 넣은 다음 목판으로 막았다. 복장의 내용은 견포(絹布, 비단으로 짠 베)와 향목(香木, 향나무)이며 따로 창호지에 쓴 발원문이 있다. 여기에 있는 옹정(雍正) 4년은 영조 2년 서기 1726년이다. 이 목불은 현고(現高) 약 20cm의 소상(小像)이나 조성연대가 분명한 조선조의 불상이다. 이 불상 조사 시에는 절에서 대수롭지 않게 방치하고 있었으나 마땅히 보호가 있어야 할 불상이다.”
또한 당시의 자료로 보이는 목불의 복장유물인 불상 조성 발원문에는 ‘옹정 4년(1726) 4월 강원도 삼척사면(三陟四面) 태백산 지장암 조성 발원문’이라고 쓰여있어 분실된 목불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상 조성 발원문(佛像造成發願文)
존숭하는 불상을 조성함은 예에 의거하였으니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니 대성인이시다. 천안(天眼)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성심과 믿음으로 예를 드려 수행을 통해 얻은 훌륭한 인연으로 부처님의 약속을 받네. 저 멀리까지 내리는 법의 비(法雨)로 티끌과 때를 씻어 내며 곧 더 없는 깨달음으로 성불의 약속이 있다네. 산에 들어와 도를 닦아서 마구니(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물리치고 일생에 갑작스런 재난을 만나지 말기를 비네. 곳곳마다 현명한 선생과 벗들을 서로 만나고 삿된 길(邪道)로 들지 말고 바른길로 나아가기를 비네. 문수보살이 지닌 여러 종류의 지혜를 단번에 깨닫고 보현보살이 행하는 모든 실천행을 널리 닦기를 바란다네. 지장보살과 같이 실천하는 서원(誓願)을 함께 닦기를 바라니 악한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의 소원도 이룰 수 없네. 천사의 옷에 반석이 닳도록 오직 나를 연마하여 깨달음의 결과를 증명하고 중생 구제야말로 또한 부처라네.
엎드려 모든 성중(聖衆, 부처님, 보살, 아라한 등 깨달은 존재)에게 청하오니,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를 입게 하셔서 나의 서원은 깊고 깊어 다함이 없다네. 이와같이 바라는 바는 널리 맹세하여 원하는 것이니 오직 여러 부처님이 증명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네. 이에 받들어 비오나니 주 된 세 전하(殿下)는 만세세(萬歲歲)토록 이어지시고 성중은 만세토록 사시고 금가지(金枝)는 번성하고 옥잎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전쟁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화가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온 백성이 어지러움 없이 항상 편안하기를 바라나이다.
평생 동안 서원(誓願)을 세워 불상 조성 비용을 혼자서 전담하여 마련한 큰 시주자 곁에서 대신 예배하고 돌아온 단신(獨身)의 자손이 이제 목현의 주인이 되었으니 복과 수명을 더하여 한수동(韓壽同)을 주(主)로 하여 발원하오니 (그가) 마땅히 정토(極樂淨土)에 태어나기를 바라나이다.
바라옵건대 함께 하는 일체의 중생들은 피안(彼岸,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에 오르고 덧없는 세상일지라도 보살의 도리를 행하게 하옵기를 마하반야바라밀(위대한 지혜의 완성)이시여. 이 인연있는 법회에 순서를 맡아 집행한 스님 도성이 바라나이다. 지전(持殿, 주지) 동부도 바라나이다. 아울러 모두 두었으니 허찬도 바라나이다. 면찰도 바라나이다. 도관도 바라나이다. 성현도 바라나이다. 이 양주(養主)인 초화도 바라나이다. 지화도 바라나이다. 노승 정매도 바라나이다. 극겸도 바라나이다. 다른 곳에 사는 도숙도 바라나이다. 대공명(大功名) 대화토(大化土)인 수호도 바라나이다. 인권(引勸, 주요 공덕주를 모으는 책임자) 도진도 바라나이다.
옹정 4년(1726년, 영조 2년) 병오년 4월 상(上)에 강원도 삼척 사면(四面)의 태백산 지장암에서 불상을 조성하였으니 공이 있는 바를 암자에 안치한 뒤에 기록하였다.” Ⓒ이장국
발원문에서는 사회의 평화와 백성의 편안함을 먼저 축원한 후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976년 당시 진홍섭 교수가 쓴 글로 미루어 보면 이 목불의 예술적 완성도는 조금 떨어지는 듯하나 불상 조성 발원문에 연대가 명기되어 있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목불은 1967년 학술조사단이 삼화사를 조사했을 당시와 1976년 진홍섭 교수가 글을 쓸 때도 삼화사에 있었으나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석장이 생기면서 구 삼화사를 다시 중대사 옛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분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유산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되찾아서 삼화사에 안치될 날을 고대해본다.
〈참고문헌〉
동해문화원, 『두타산의 역사』, 도서출판 청옥, 2009.
동해시, 『두타산과 삼화사』, 도서출판 민족사, 1998.
장정룡, 『동해시 삼화동의 기층문화』, 동해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