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by Qrie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Stuttgart, <두 번째 일기장>



누군가에게 바다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은, 새들은 어떤 이유로 바다를 찾아오는 걸까요.

제 삶에서 유일한 욕망이 있다면, 그건 사랑 속에서 살고 싶다는 거예요. 제 삶에서 유일한 실수가 있다면, 아마 그건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빚은 거예요.


*

언덕 위 학교 정원에 오늘도 들러요. 장미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하지요. 장미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에요. 오늘의 장미는, 잎엔 검은 반점이, 열매는 새가 먹어 찢어져 속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아름다움이 보일 수 있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어요. 수많은 연인들에게 오갔던 장미 꽃들이 떨어지고, 얼어 녹아 내리면, 남는 열매들. 그 열매는 새의 먹이가 되고,

때론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떨궈버려야, 내년의 꽃이 와요. 미래의 꽃이 피어요.

순간 광주의 5.18 어머니들이 생각 났어요. 인간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요. 겨울의 지는 꽃과 봄에 피는 싹, 여름에 피는 꽃. 가을의 열매.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듯해요.

빛과 바람의 울림 속 담담히 뿌리내려 듣는 삶을 살아가면서 말이죠.



2025년 12월 19일 Stuttgart <세 번째 일기장>



알아보기.

알아본다는 건,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이 거기에 있음을, 누군가의 먼지를 털어주는 행위에서 나온다.

청소하는 것과 알아보는 것은 사실 한 뿌리다.



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Stuttgart



새 방은 빛이 잘 든다. 아침 빛이 좋다. 일어나 커튼을 젖혔는데, 붉고 노란 빛이 구름에 매달려 있었다. 새 방 창문으로는 유겐트 세미나Freies Jugenseminar에서 친구들과 장작 때울 때 쓰는 둥글고 작은 광장 같은 마당 공간과 나무들 (그 중에 어떤 나무는 잘린 기둥 위로 얇은 가지들이 무수히 솟아 올라왔다), 맞은 편 산과 (방 창문이 산등성이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 뜨는 해가 보인다.

오늘 하늘은 뜨는 해 옆으로, 구름에 매달렸던 노랗고 붉은 빛이 어느정도 지나자, 붉고 푸른 띠를 가진 흰 빛이 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tempImagejI4Ruq.heic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은 해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빛이 나온건지 신기하다. 2025년 12월 20일 아침



2025년 12월 23일 Stuttgart



나는 지금 일기를 쓰고 있다. 2025년 12월 24일이 두 시간 전에 시작되었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에 풍경이 울리고 있다.

하늘은 어두운데도, 빛이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2025년 12월 25일 Stuttgart, Schulgarten



땅에 몸을 기대고 맡기고 눕는다.

땅의 무게를 느낀다.

하늘을 바라본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새도 안 도망간다.

누워서 바라보는 땅과, 하늘.

둥글다.



2025년 12월 27일 <한 사람> Stuttgart



오후 두 시면 친구 (정)말루가 온다. 세미나 청소를 한다. 나를 씻는다.

삶은 양배추에 된장을 버무려먹고, 키위를 먹는다.

정오의 햇빛이 연하고 넓게 하늘과 공기에 가닿는다.

나는 친구를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랑의 길을 떠나기 위한 저고리를 정돈한다. 밖은 춥다. 그래서 저고리를 단단히 매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저고리의 옷매무새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춥고 어둡고 험한 산을 넘고 넘어 걷던 사람, 누군가에게 가기 위해 그 저고리를 단단하게 정갈하게 동여매고 길을 떠나는 사람. 그 사람이 걸으며 디뎠던 흙(땅)의 느낌과 종아리의 힘, 바라보던 밤 하늘의 별과 아침 빛.

숲을 헤치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한 사람.



tempImageEi6Uvq.heic 김강정 친구들이 처음 이곳에 모인날 지어먹은 호박스프, 2025년 12월 31일 저녁




2025년 1월 8일 <김강정 친구들이 다시 한국과 러시아로 돌아가고> Stuttgart



내 주변에는 진심으로 좋은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내 곁에 다정하고 깊게 머물다, 다시 자신의 리듬과 시간을 따라 가고,

다시 돌아올 철새와 땅과 호수의 약속처럼.


홀로 있는 시간에 우리의 기억은 때론 향기로 나타난다.

나는 어떤 향기를 더듬거리고,

어떤 향기를 기억하며

어떤 향기를 찾아 떠난다.


향기가 아닌 것도 기억한다.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건지

친구는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다.

나는 이야기하고 친구는 듣는다.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될까,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우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토록 다양한 존재를 친구로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까.


친구가 없다면 어떻게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

노래할 수 있을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처럼

길을 만들어내며

내려가고 내려가고

때론 날아올라가는,

존재와 존재 사이

푸른 행성 속

생명들 사이에서 꿈틀이는

모든 움직임들.




2026년 1월 12일 유겐트 세미나 학기 첫 날, 눈.



눈을 감고, 들리는 소리로 그림을 그리기 손에 잡히는 것에 대해 그림 그리기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 대로 그리기.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모순 같지만, 종이가 아깝고 연필이 아깝고 시간이 아까울 것 같지만,

마음속에 나오는 느낌을 따라가며 몸으로 그리는 그림이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일지, 과연 어떤 존재가 나를 찾아올지 자꾸 궁금하게 만들었다.

종이에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릴 땐, 망설이는 내가 보였다. 저기로 더 나아가도 될까. 과연 종이의 끝은 어딜까. 우리가 눈을 감을 때 몸은 난다. 종이 끝부터 끝까지 멀리 멀리, 때론 심의 옆면으로 때론 모서리로, 주먹 쥐고, 연필 꼭대기로,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더듬 더듬 그려간다.

눈을 감으면 우린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tempImageSNdLat.heic 종이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손의 감각으로만 느끼며 그린 친구 그림, 2025년 1월 12일



tempImagenKlFKP.heic 친구들과 그린 즉흥 그림, 2026년 1월 13일




2026년 1월 17일



어젯밤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연히 따뜻하게 되겠지란 믿음으로 얇은 옷에 얇은 이불만 덮고 잤다. 그래서 어젯밤과 오늘 새벽은 추웠고, 나는 하루내 코를 훌쩍이며 보내게 되었다.

M은 오늘 따뜻하게 자라고 잘 익은 감귤 같은 사랑 어린 문자를 나주에서 보내주셨다.

밤이 다가오자, 나는 따뜻하게 잘 준비를 한다.

얇은 전기 요를 깔고, 물주머니에 넣을 물을 뎁히고, 옷도 위 아래 두 겹씩 껴입고, 생강차도 홀딱 마셨다.


*

나는 나의 이야기를 지어 가야겠다.

겨울이 다가올 때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서 털실을 비비고 만져가며

누군가의 목도리를 짓는 사람처럼.

내 몸의 감각을 사랑하고 싶은 밤이다.


*

세상의 무수한 빛을 바라보고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시간.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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