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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Sep 08. 2023

일평생 언니라니

늦깎이 엄마의 남모르는 비애, 그 터닝포인트

누군가의 먼저는 늘 편치 않다. 순서상 우위를 선점했으니 내심 다른 무언가를 선보여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언니니까 OO 해야지."

"네가 누나잖아. 그러니 이해해."


첫째라면 누구랄 것 없이 어느 정도 축적된 분량의 압박이다. 생각할 겨를 없이 마음에 채워진 의무랄까.

 첫째다. 일평생 언니, 누라는 호칭이 운명 삼 남매의 장녀다. 익숙할 한데 부족한 나를 볼 때면 타이틀당장 반납이라도 하고 싶다. 내 의지로 결정한 순서도 아닌데 살짝 억울할 때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수많은 언니들을 만났다. 누군가를 "언니!"라고 칭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언니라는 족쇄에서 풀려난 자유함,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뒷자리가 안락다. 내게 걸쳐진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단어였다. 더구나 나보다 언니 같은 동생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내가 갖긴 싫고, 남에게 주고 싶은 말, 바로 '언니'다.




한국에서는 관계설정할 때 나이가 중요하다.

무언(無言)의 강력한 문화적 기준이다.


"몇 살이세요?"

"몇 학번이세요?"

"어머, 어려 보이시네요."


외국에서는 첫 만남에서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질문이. 들춰내기 예민한 개인적 신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그저 가벼운 통과의례라는 것에 그들은 놀란다. 한국인들은 관계를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설정하는 기준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호칭을 정리하여 예우를 갖추려는 동방예의지국의 뿌리 깊은 관행이 언제부턴가 불편해졌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평균에서 저만치 떨어져 나올 무렵부터였다. 내 안에서 조차 소화되지 않은 덩어리 진 마음공개적으로 툭툭 건드려지는 숫자, 나이에 따른 관계의 질서 부담스러웠다.


늦은 나이의 으로 아이와 묶인 모든 관계에서 난 니가 되었. 그것도 몇 단계를 건너뛴 왕언니다. '엄마가 젊지 못해 미안해.'라는 마음 때문인지 조리원에서부터 위축되기 시작했다. 를 아기띠에 척척 매고 다니는 젊은 엄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 출산 후 손끝부터 발끝까지 통증을 달고 다녔던 산후통 때문에 나에겐 엄두도 못 낼 일이으니까. 언제나 아들은 엄마가 아닌, 아빠의 가슴팍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이를 들어 안아줄 수 없던 그때가 미안해서 지금도 뜬금없이 안아주곤 한다. "엄마, 왜 그래요?" 맥락 없는 허그에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이젠 일상이 되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준다. 아들, 그땐 엄마가 건강하지 못해 미안했.


 극심한 통증과 평생 안고 갈지 모른다는 아득한 우울감에 헤맸. 안 아픈 관절이 없었다. 무릎을 굽힐 수 없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힘겨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한 고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신없이 육퇴(육아 퇴근)를 했다. 새벽이면 한 시간마다 깨어나 울어재끼는 아들의 예민함으로 잠도 제대로  수 없었다. 꼬물꼬물 사랑스러움이 흥건한 아기를 보며 어차피 망한 엄마 ,  위해 갈아 넣자의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게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했지!"


친정 엄마의 핀잔 아닌 근심위로는커녕, 심신을 더 너덜너덜 찢어놨. 그렇게 인생이 내 맘대로 됐으면 일찍이 20대에 아들, 딸 둘씩 쌍으로 낳아  러 냈겠지. 내가 여고생일 때조차 삼십 대였던 우리 엄마가 날 이해할리 만무하다.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 학부모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내심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를 찾으려 했 모양이다. 하지 역시나 또 언니다. 호칭이 주는 겨움, 일평생 언니라니. 태어날 때부터 지워진 나의 숙명이려니 하다가도 비빌 언덕이 될 언 하 허락되지 않는 늦깎이 엄마의 운명적   애석하다.


언. 니.

나이를 거꾸로 먹지 않는 한 부를 수 없는 대상이. 나라는 존재를 나는 가질 수 없다니. 앞에서 찾지 못한 답을 자꾸 뒤에서 뒤적인다. 가만히 날 거꾸로 뒤집어 본다. 입장을 바꾸니 희미하게 답이 보인다.

아하! 언제나 언니가 되어주는 운명, 적어도 누군가에게 호칭이 주는 든든함 선사할 수 있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음 받침을 먼저 내어주고 다시 돌려받으면 되는 것을. 같은 육아의 터널을 지나온 엄마라면 서로의 고충쯤은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질  있는 것을.

호칭이 주는 불편함에서도 점점 벗어난다. 어제 휙 날아든 문자 덕분이다.


"언니!!!!!!!!!!(처음 불러 보네요) 저랑 언니가 함께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나이대 아이들을 키울  있어서 새삼… 오늘…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고 다행스럽다고 느꼈어요. 좋은 인연주신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하지만 그래도 저랑 매번 함께 해주셔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헷."


입학 때부터 살갑게 다가와 챙겨주던,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젊은 엄마다. 문자도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지. 무뎌진 연애 세포들을 한꺼번에 깨우듯  달콤한 고백이 되 준.


젊은 엄마의 입에서 엄청난 개수의 느낌표와 함께 '언니'라는 호칭 터져 나오는 데 7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아직 조심스러운 문자. '언니'라는 호칭이 얼마나 어렵고 어색했을까. 마음을 열어준 용기에 감동이 밀려왔다. 부담이 아닌 따스함이었다. 내가 뭐라고 '언니'라고 불러주다니.


누군가에게 '언니'는 그저 숫자의 많고 적음 갈음하는 기준이 아니다. 'OO엄마'에서 매끄럽게 혀굴려 넘어가는 말 아니다. 마음의 거리, 관계의 깊이다. 함께의 시절이 익어야  입에 담아 삼킬 수 있는 열매다. 그 어렵고도 귀한 호칭을 난 마음으로 받지 않고 밀어내려고만 했.


관계의 깊이를 가늠하는 단어.

마음을 여는 호칭.

익어야 깊은 맛이 나는 말.


일평생 언니는 비애가 아선물이다.

그 비밀을 발견하게 해 준 젊은 엄마,

나이만 어렸지 언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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