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형수님 집에서 혼자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 집에 와서 시간 좀 보내다 가시죠?"
"아니야,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 밥도 안 챙겨 먹고 있을 거야. 얼른 가봐야 해."
후배의 유혹을 무릅쓰고 남편은 점심도 먹지 않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맞다. 난 스스로 챙기는 것도 서툰 헐렁이 중의 헐렁이다. 그런 아내를 챙기는 남편, 내 복이다. 주일 아침, 남편과 아들의 아침을 챙겨주고 교회에 보낸 후 바로 침대와 혼연합일이 되었다. 워낙 건강 체질이라 잘 아프지 않지만 한 번 아프면 크게 아프다는 게 함정이다. 끙끙거리며 오전 내내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다.
"나 계속 잤어."
"응 잘했어."
"어디야?"
"하나로 마트"
"벌써 집 앞이야?"
"응. 아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지? 해봐"
"엄마! 저 엄마 선물 사서 가고 있어요."
"무슨 선물?"
"비밀이에요. 가서 줄게요."
두 남자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맞이할 시간이다.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시간이 싹둑 잘려나가 버린 것 같다. 그래도 나를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오고 있는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에 반가움이 앞선다. 자잘한 비밀이 많은 아들 녀석의 선물도 궁금해진다.
'띠띠띠띠띠'
경쾌한 도어록의 버튼 소리가 들린다.
"엄마!"
청아하고 맑은 아들의 목소리가 다다다 뛰어오는 발소리와 협연을 하며 울려 퍼진다. 침대에서 거실 소파로 건너와 누워있는 나에게 폭 안기는 아들을 두 팔 벌려 꽉 감아 안는다. 아들은 바로 선물을 내민다. 죽과 편지다.
"엄마 죽 먹고 빨리 나아요 (하트) - 서율이가"
삐뚤빼뚤 꼬깃꼬깃 접힌 편지가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준다. 그런데 죽은 어디서 산 걸까?
"아빠랑 하나로 마트 가서 산 거야?"
"아니요. 오늘 주일 학교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편의점 같이 갔는데, 내가 엄마 죽을 딱 발견했어요.
그런데 2+1 행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3개 사 왔어요."
"너 먹고 싶은 과자랑 포켓몬 빵 안사구?"
"네, 엄마 줄려고 죽 샀어요."
매주 엄마 손을 잡아끌고 편의점 가서 자기가 사고 싶은 거 사던 꼬꼬마인데 집에 남겨진 아픈 엄마를 생각하며 자기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죽을 사 오다니, 순간 눈물이 핑 돈다. 하루 전날 학부모 모임에서 딸 아들 다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 "아들은 딸과 달라서 서운한 게 참 많은 것 같아요."에 서로들 전적으로 공감하는 걸 봤다. 나 역시 무녀 독남라 비교 불가이지만 종종 서운함을 겪어와서 '도 닦는 마음으로 살자.'로 방향 선회 중인 터라 살짝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훅 파고들면 너를 품은 나는 이제 어쩌리오. 아파보니 아들은 표현에 서툴렀을 뿐 나의 사랑을 먹고 다 기억하고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느낀다.
감기에 옮을까 마스크 쓰고 멀찍이 밀어낼 때마다 더 가까이 와서 내 마스크를 벗겨낸다. 입에 직격탄으로 뽀뽀를 날리며 "엄마, 나 이제 옮았으니 괜찮아요!" 하며 더 가까이서 치댄다.
"아빠, 엄마 미열 나는 같아요!"
열감을 알아채고 직접 체온도 재어 준다. 웬걸, 38도가 넘었다. 진짜 나도 몰랐는데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엄마 잠시만요."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서 수건을 적신다.
"엄마, 겨드랑이 한번 들어봐요. 엄청 뜨겁네."
놀랍게도 열이 날 때마다 아들의 머리맡을 지키며 물수건으로 열이 차는 곳을 적셔주었던 지난 병간호의 시간들이 아들의 머릿속에 모두 각인되어 있다. 엄마가 했던 방식을 하나하나 상기하며 그대로 해준다.
"아들, 너무 고마워. 엄마 금방 나을 것 같아."
"엄마 사랑해요. 빨리 나아요."
남편도 역시나다. 하나로 마트에 왜 갔을까... 했더니 기침에 좋다는 생강차와 목 살균을 위해 좋은 꿀을 사 왔다. 집에 오자마자 와이프 보신 시킨다고 추어탕을 사러 나가질 않나 저녁 내내 약 챙겨주고, 생강차 타주고 보초 서듯 옆에서 돌봐준다. 부전자전이다. 늦게라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누리지 못할 호사다.
병원검진을 받고 다행히 코로나가 아니라 안도했다. 결혼해서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안도했다. 젊고 혈기 왕성할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있는 날들이 많아 아쉬움이 없지만, 세월이 싣고 가는 청춘과 건강은 나이 들어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자발적 고독으로 주체적인 독립성을 갖는 것, 큰 매력이다. 하지만 나는 걸리적거리더라도 1인의 삶을 살짝 포기하고 옹기종기 모인 투닥거림을 선택했다. 모든 선택은 옳고 그름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선택을 옳게 만드는 노력은 해야 한다. 운 좋게 큰 노력을 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넘어짐에 기댈 수 있는 원군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늦었더라도 나에게 이런 지원군이 인생에 더 필요한 마력인 것 같다. 병시중을 위해 늘어선 사진 속 지원품들이 나에겐 거추장스럽지 않고 따스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