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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May 25. 2024

오늘을 테두리 친 사진첩

기다림의 진중한 의미

 소만(小滿), 작은 것이 가득 찬 절기이다. 풍부한 햇살을 품고 작은 식물들이 잘 자라서 짙은 녹음으로 꽉 차게 되는 시기. 시절의 때를 지나치지 않으려는 듯 학교 일상도 자잘한 업무들 빼곡히 들어차서 쉴 틈이 없다. 한 번의 지필 평가와 두 차례의 모의고사를 치르고 난 이후 학생 상담, 학부모 상담, 수행평가, 2차 지필 평가 문제 출제 등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되어 그대로 뻗어 초저녁 잠을 자기까지 이례적인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살결을 덮은 얇은 옷이 어느새 땀기운을 몰고 오고야 마는 초여름이다. 걸쳐 입고 간 겉옷을 기어이 벗게 만드는 계절 온기를 거슬러 아이들은 춘추복에 동복까지 챙겨 등교하는 날이다. 1차 야외 촬영에 이어 2차 교내 졸업사진을 찍기 위함이다.


"선생님, 교복 와이셔츠가 작아졌는데 어떻게 하죠?"

"교복 마이가 없는데 어쩌나요?"

"사진은 어디까지 나오나요? 아래는 반바지 입어도 될까요?"


 이미 교복과 작별한 지 오래된 아이들에게 다시 교복을 챙겨 입히는 애로사항이 많다. 고등학교 교문을 처음 밟던 삐약이 시절 교복이 2년 간의 성장세를 가두어 놓을 가 없다. 가로로 세로로 훌쩍 커져버린 녀석들, 몸만큼 마음도 컸으리라 생각하며 끼어 입고 빌려 입고 반만(상의만) 입고 3박자에 맞춰 사진을 찍도록 했다. 잘 입지도 않는 교복을 새로 맞출 수도 없고 오늘만 잘 버티고 때워보자는 심산이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오랜만에 수업을 건너뛸 수 있다는 암묵적 흥분과 희열이 충만하다. 단연코  정점은 그룹별 콘셉트 사진이다. 디즈니 공주, 포켓 몬스터, 원시인, 조리사, 건설 현장, 등산객, 마리오, 뉴진스, H.O.T(이들이 캔디를 알다니! 의외로 다 안다)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소환된다.

 아침부터 새롭게 변신한 아이들로 북새통이다. 고3이라는 무채색의 캔버스 구석구석을 무지갯빛으로 붓질을 해놓은 듯 교실마다, 복도마다 색들 향연이 찬란하다. 수업을 해야 하지만 허용적인(?)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바이브 만연해 있다.


 "선생님의 오늘 콘셉트는 뭐예요? 공주예요?"


수업을 들어갔더니 기분 좋은 말로 예쁘게 마음을 띄워주는 아이들이 있다. 야유를 받을 각오를 하고 가볍게, 농담처럼 받아친다.


"얘들아 이게 콘셉트이니? 일상이지!"

"아, 맞아요! 항상 그렇죠!"


 오잉? 이 반응은 무엇인가. 아이들의 활기에 덩달아 건넨 농담이 예쁜 답장으로 돌아오다니. 원래도 인성갑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졸업 사진의 분위기에 마음까지도 더 넉넉해진 모양이다. 교탁 위에 파, 무, 당근 등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저희 모둠은 소품비 8,000원씩 밖에 안 들었어요."


 의복 대여비만으로도 1인당 3만 원을 훌쩍 넘게 쓰는데 경제적 알짜 개념이 들어차있는 모둠이다. 급식실에서 조리사님들께 조리복, 식판, 앞치마, 장갑 등을 다 빌리고 야채와 채소만 구매했단다. 아이들의 추억 짓기에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신 조리사님들의 센스에 감탄, 아이들의 경제  센스에 두 번 감탄이다. 시간이 흐르며 아침 일찍 터친 샴페인이 김 빠진 콜라가 되어가는 형국이다. 모둠별 콘셉트사진, 개인 사진, 수능 원서 사진 세 컷을 찍는데 장장 6교시까지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3학년이 열두 반이나 되다 보니 기다림의 시간에 치여 아이들의 생기가 쭉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징얼징얼 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기다리는 게 너무 피곤해요."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감정선의 출렁임에 웃음이 난다. 원래 인생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을 품에 안는 순간을 또렷하게 떠올리며 붙들고 있으면 덜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놓치면 쉽게 지치고, 쉽게 잊는 법이다. 한 해에 마침표찍힐 무렵 아이들은 오늘이라는 종일의 기다림이 묻어난 앨범을 펼쳐보게 될 것이다. 지나버린, 하지만 존재했던 오늘의 흔적들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현물이 손에 쥐어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어느 5월의 하루가 또렷하게 찍혀 앨범에 담기는 역사, 의미 있는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허비된 시간이 하나도 낭비되지 않는, 고스란히 그리고 또렷하고 선명하게 박제되는 과정.

그래서 오늘의 순간을 테두리 쳐서 마음 사진첩에 끼워두기로 다. 문득 떠오르면 다시 꺼내 보기 위해서. 안개처럼 뿌옇게 기억이 흐려질지 모를까 호호 닦아가며 글로 남다. 기다림, 그 진중한 의미를 새기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기다리는 것이다.
가장 쉬운 부분은 기다리던 것을 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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